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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 반만 생각하고 반만 연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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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생각하고 반만 연연하자
“꽃이 또 한 송이 피었네!”
요즘 우리 부부는 꽃을 보는 낙으로 사는 것 같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먼저 온 남편이 화분을 들고 쫓아왔다. 주황색 꽃이라도 삼킨 듯 얼굴과 목소리에 온통 화색이 돈다.
우리가 보내는 사랑과 호감의 눈빛에 꽃은 주저 없이 반응하고 있다. 세 번째 송이가 엊그제 나왔는데 바로 옆에 또 한 송이마저 피워 물었다.
아마릴리스, 이 꽃은 셜리 할머니한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플라스틱 화분 안에 주먹만 한 알뿌리 하나와 물기를 뺀 거름흙이 압축 봉지에 담겨있었다.
홀리데이 기프트 그로잉 키트라니 생경했다. 홀리데이 선물이 정말 다양해졌다. 이런 선물은 생전 처음이라 신선했다.
“후유~” 알뿌리의 탄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벌써 연둣빛 떡잎이 꼬부라진 채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 있었다.
습기도 없는 캄캄한 박스 안에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애태웠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이 날을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참고 견뎌냈을 거라 생각하니 안쓰럽고 고마웠다.
알뿌리가 숨을 고르는 동안 설명서를 읽으면서 흙에 물을 부었다.
눈 깜짝할 사이 흙은 베이킹 파우더라도 삼킨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함께 온 화분에 준비된 흙을 넣고 알뿌리를 심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키우기로 하고 제일 잘 보이는 대문 옆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신기하게도 꼬부라졌던 떡잎은 온데간데 없고 중지 크기의 기둥 하나가 화분 중앙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기둥은 자고 나면 배가 되고 또 자고 나면 배로 자라 있었다. 그렇게 두 주쯤 지나자 꽃대는 얼추 15인치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원래 그런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파리 하나 없이 기둥 하나만 덩그러니 올라온 게 꽃이나 필까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일 마치고 집에 오니 꽃이 피어 있었다. 마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꽃대처럼 꽃도 초고속으로 피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피었으니 지는 것도 초고속인가 보다. 어제부터 맨 처음 올라온 꽃이 눈에 보이게 시들해졌다. 하지만, 기다란 꽃대 위에 네 송이 꽃은 여전히 예쁘다.
예쁜 주황색 꽃은 나팔 같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동서남북으로 열려있는 나팔. 꽃은 그 나팔을 통해 들려주는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꽃의 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꽃의 말이야말로 단순한 말이 아니라 로고스라고 생각한다.
이만큼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뱉어 놓은 말은 돌고 돌다가 언젠가는 꼭 내게 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좋은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 멋지게 자라 넓은 그늘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로고스가 되지 못하는 말, 하지 말아야 했던 말은 돌고 돌 사이도 없이 뱉는 순간부터 내 안에 그늘을 틀고 앉아 자리를 넓히고 어둠을 키운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좋은 말도 삼세번이다”가 있을까.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들으면 소음이고 덕담도 길어지면 잔소리다. 솔직해서 좋다는 말도 옛말인 것 같다. 솔직한 이야기도 때론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말은 태어나는 순간 복수가 된다. 빤한 거짓말에도 절실함은 있듯 절절한 절실함에도 함정은 있다.
그러나 알면서 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마음이고 업보이다.
나의 누구라서 혹은 그대, 당신이니까 따위로 예쁘게 포장된 말에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기도 하고 그 말에 충전이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또한, 그 말에 길을 잃기도 하고 찾기도 하며 영원히 안주하기도 하고 영원히 서성이기도 한다.
나름대로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은 했으니까. 물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솥뚜껑 뒤집어 놓고 전이라도 붙여 나눠 먹고 싶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그것도 견딜 수 있었다. 올 한해도 그럭저럭 그대로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다리 꼭대기에 올려놓고 저거 언제 떨어지나 노려보지 말고 넓은 세상 바라볼 수 있도록 서로 사다리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주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릴리스와 눈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새해 첫 달이 다 가고 있다. 복 많이 받고 건강하게 살자고 덕담을 나누던 게 어제 같은데. 요즘의 내 하루는 우리 집 아마릴리스처럼 초고속으로 피었다 진다. 속절없이 가고 또 온다.
날마다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기로 한다. 뒤에서 침 튀기지 않고 앞에서 인사하고 마음 전하기로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너무 애태우지 말고 오래,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 딱 반만 생각하고 반만 연연하도록 노력해보기로 한다.
말의 냄새 / 김미희
열네 번째 소리가
목줄을 놓고
중심을 돌아선다
어떤 말은 영글기만 해
빙판에서 통통 알몸을 굴리다가 얼어버렸고
직선으로 꽂는 말은 너무 깊어서 어두워 어두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마구마구 찔러만 대고
마음 바깥으로 내도는 말은 너무 차디차
가슴만 퉁기는 요란한 소리
먼 데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은
번번이 휘청거리다 잘못 짚은 주소를 손금에 꽂고
아프다 아프다고 진짜 통증처럼 찌푸려대네
살랑살랑 흔들리는 말이 감정에 밀려
나비를 불러온 줄 알고 헤헤 그러다 그만
꽃째 떨어지고 말았어
미지근한 말은 늘 심심해
그 안에 온돌을 놓고 이부자리를 깔고
확신의 표정을 가장자리부터 드르륵 박아버렸어
아 역겨운 입 냄새들이여
제발 향을 뿌리고 오시든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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