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혜자의 세상 엿보] 토마토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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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에 토마토 모종을 네 그루 사다 심었다. 이곳에서도 소위 밭농사 짓는 집 치고 토마토를 안 심는 집은 거의 없다는데, 남들은 쉽게 키운다는 토마토를 난 어쩐 일인지 제대로 길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여, 올해는 토마토 농사를 전문적으로 짓는 유튜버에게 열심히 배워서, 보란 듯이 길러볼 계획을 세웠다. 제대로 기르자고 작정하니, 물이나 흙부터 거름까지 신경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 갖은 정성을 기우렸는데도 토마토는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별로 달리지 않았다. 다시 전문 유튜버를 찾아보니, 잔가지가 너무 많아도 영양분을 불필요한 잎들에게 다 뺏기기 때문에, 곁순 따기와 순지르기를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난 조석으로 토마토 잔가지를 제거해주었는데, 그 때마다 토마토 향이 온 가든에 퍼지는 걸 느꼈다. 토마토가 안 맺힌 모종에도 곁에 가기만 하면 사먹는 토마토에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토마토 고유의 상큼하고 시큼한 향기가 주변에서 나는 것이다. 그건 아주 오래전에 맡았던 익숙한 친구의 향기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동네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비닐하우스로 토마토농사를 짓는 집이 있었다. 마침 그 집이 같은 반 친구인 옥숙이라는 아이의 집이었다.
키가 크고 수더분하게 생긴 그 친구는 학교 배구선수였는데, 방과 후면 늘 그 비닐 하우스안에서 토마토 밭을 지켰다. 친구는 혼자서 비닐하우스를 지키는 동안 너무 무료했던지 자주 나보고 놀러오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 친구와 나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만화와 토마토 였던 것 같다.
왜냐면 당시 우리 집에는 늘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온 동네 만화 바꿔보기가 주로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다. 오빠와 나는 만화 읽는 속도가 워낙 빨라, 보는 즉시 여기 저기 빌려주거나 바꾸어 읽고 대여기간 반납도 우리가 도맡아 했다.
친구는 가끔 내가 만화를 가지고 가면, 환한 얼굴로 토마토를 얼마든지 따먹으라고 하고는, 기다렸다는 듯, 만화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요즘이야 토마토가 지천이지만 당시만 해도 토마토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아, 난 자주 친구네 비닐하우스를 들락거렸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시장에서 쉽게 맡을 수 없는 토마토 고유의 향기가 몹시 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닐하우스라는 밀폐된 공간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유럽속담에 토마토가 익는 계절이 오면 의사가 필요없다는 말이 있다.
장수노인들이 즐겨먹는 다는 지중해식 식단에도 꼭 안 빠지는 필수품인데, 살라드나 스파게티등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의 주 재료이기도 해서, 이곳에서는 토마토소스나 토마토가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국마켓에 가면, 콩나물이나 두부를 거의 필수적으로 사는 것처럼 이곳사람들은 토마토를 집는 것이다.
종류도 다양해서 방울토마토부터 좀 길쭉한 로만 토마토, 햄버거나 샌드위치에 넣어 먹는 사이즈가 좀 큰 토마토, 줄기채 파는 바인 토마토등 다양하다.
요즘은 그냥 생으로 먹는 것 보다 살짝 익혀서 먹거나 기름에 볶아먹으면 항암물질인 리코펜이 더 활성화 잘 된다 하여, 조리를 해서 먹는 편이다.
오래전 유방암에 걸렸던 한 친구는 수술후 의사의 권유로 아침마다 토마토를 살짝 익혀 믹서에 간 토마토쥬스를 지속적으로 먹었더니, 회복에 많이 도움이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토마토의 정체성을 두고는 아직도 말이 많다. 채소인지 과일인지, 생긴 건 과일같은데 맛은 채소 같고,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 채소와도 좀 달라서, 늘 퀴즈의 단골이슈가 되곤 한다.
이런 궁금증은 오래전에도 있었던 듯, 기록에 보니 1893년 뉴욕주 대법원에선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뉴욕주는 수입채소에 대해 10프로의 관세를 매겼는데, 이 관세를 내기 싫은 상인들이 토마토는 채소가 아니라 과일이라고 우긴 것이다. 이에 뉴욕주 대법원은 채소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유는 토마토가 과일처럼 후식이 아니라, 메인 요리의 주재료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즘은 수박, 참외, 토마토, 딸기 같은 열매채소를 과채류로 분류한다. 오랫동안 과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채소이기도 했다니, 문득 이 과채류의 정체성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반인반수의 신으로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체는 말의 형태를 지닌 이 신은 인간의 이성과 동물의 육적인 특성을 함께 지녀,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신이기도 하다.
멀티 플레이어가 각광을 받고 있는 이즈음, 세태에 어울리는 토마토, 겉과속이 다른 사람을 바나나나 수박에 빗대기도 하는데, 속까지 빨간 토마토로 올여름 무더위를 이겨봐야겠다.
살사소스를 비롯, 간단한 아침으로 그만인 토마토 달걀볶음, 토마토 프리타타에 모짜렐라치즈를 넣은 토마토 카프레제 까지 토마토의 변신은 무궁무진하다. 한국에선 장아찌와 김치까지 담아 먹는 다니 과연 전천후 연예인 같기도 하다. 생각만 해도 토마토향기 물씬 나는 여름이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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