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심야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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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설렜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어려서부터 영화라면 잠도 밀쳐 놓고 턱 받히고 앉아 넋을 빼더니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좋다. 20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를 신나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극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갈 것도 아니면서 마냥 좋았다. 전에는 저녁까지 챙겨 먹고 놀다가 아이들과 함께 밤에 상영하는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토요일 밤의 즐거움이었다. 특히 여름 방학을 겨냥해 내놓는 영화는 다양해서 한여름 밤의 데이트는 늘 기다려지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극장 문을 열었다고 해도 나갈 엄두를 못 내고 두 해가 넘도록 랩탑을 품고 다녔다. 앉으나 서나 일할 때나 늘 넷플릭스와 함께했다. 새로운 영화가 올라오기가 무섭게 해치우다 보니 더는 새로운 게 없을 지경이다. 이젠 본 것 또 보는 것도 괜찮아졌다. 어제는 일하면서 전에 보았던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보고 있는데 우리 막내와 같은 또래 청년이 들어와서는 “혹시, 길모어 걸스를 보고 있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엄마랑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했다. 아마 최소한 스무 번은 봤을 건데 여전히 보고 있다고 해서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나도 세 번은 봤을 텐데 여전히 틀어놓고 일하면서 듣는다.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좋다.
토요일 밤에는 XD 상영관이 매진되어서 부득이 일요일 밤에 나가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일요일은 일찍 쉬고 싶어 밤 외출은 삼가고 있지만, 며칠 전에 손님이 와서 오랜만에 멋진 영화를 보았다며 ‘탑건, 매버릭’을 꼭 보라고 강추하는 바람에 경계를 풀기로 했다. 1986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탑건에 이어 2탄이 개봉된 것이었다. 특히 영화 탑건하면 사운드트랙을 빼놓을 수 없다. 아카데미 주제가상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을 받은 밴드 베를린(Berlin)이 부른 Take my breath away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또한 톰 크루즈를 세기의 연인으로 등극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열정, 사랑과 우정, 음악 그리고 영상미까지 담겨있는 영화 탑건은 여전히 세대를 넘는 히트작임이 틀림없다. 아마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 누군가는 탑건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20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10시 15분 상영시간에 맞춰 10시쯤 집을 나섰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스웨터도 챙겼다. 언제부턴지 남편은 팝콘과 콜라 대신 마가리따를 주문한다. 커다란 잔에 빨대 두 개를 꽂아 들고 뒤따라 들어와서는 덥석 건네준다. 어디에 가든 술 냄새가 난다 싶으면 어떡해서든 마가리따를 들고 나타난다. 그러니 마가리따를 즐기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날이다 싶으면 우리 막내에게 마가리따 만들어 주라고 미리 주문한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가 만들어 주는 마가리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 틴에이져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와 우리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끌시끌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계음이 귀를 훑고 지나갔다. 아차 자리를 잘못 잡았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유튜버라도 되는지 촬영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촬영하면서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7~80년대에 서산여중고교를 다녔다. 고교얄개 같은 하이틴 영화를 비롯해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학생관람가 영화가 서산극장에 들어오면 오후 수업을 접고 단체관람을 할 수 있게 학교에서 주선해주었다. 학교에서 극장까지는 50분을 걸어야 했다. 그땐 극장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50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허락해주는 몇 번 되지 않는 날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었다. 그날은 축제의 날이었다. 화면에 비가 줄줄 흘러내리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상관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카세트테이프에 영화음악을 녹음해서 나눠 들으며 한동안 행복한 축제는 이어졌다. 가끔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남사친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와서 얘기하면 왜 그리 부러웠던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름밤에는 모기장 속에서, 겨울밤에는 이불 둘둘 감고 앉아 텔레비전에서 하는 토요 명화극장을 빠짐없이 보는 것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보았던 영화들이 최고였던 것 같다. 그때 그 음악을 들으면 소리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리움을 만나는 것 같아 좋다.
언제나처럼 20여 분은 영화 프리뷰와 광고가 흐른다. 그동안 몇 커플이 들어와 자리가 하나둘 채워져 갔지만, 일요일 늦은 시간이라 극장 안은 한산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올여름에는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여러 편이어서 여름밤의 데이트가 이어질 것 같아 설렌다. 양쪽 벽에 걸린 불이 꺼지자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톰 크루즈 인터뷰 영상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36년,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싱싱했던 매버릭 얼굴에도 세월이 지나간 흔적은 확연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아름다웠고 더욱 선해 보여서 좋았다.
심야 극장에서 매버릭을 보며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 나를 만났다. 너무나 외로워서 눈물 흘리던 스무 살의 내가 여전히 예뻤다. 고결한 삶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내 서른 살의 삶도 존경하고 싶어졌다. 다 될 것 같은 자신감에 넘쳐 절망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던 마흔의 나도 안아주기로 했다. 아직도 서운함으로 인해 밤잠 설치지만, 더러는 겸손해지기도 하는 지금의 나도 사랑하기로 했다. 절망과 설렘 사이에서 유유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은 희망 따위를 믿는 나이가 아닐까 싶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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