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심야 극장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2-06-10 11:02

본문

아침부터 설렜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어려서부터 영화라면 잠도 밀쳐 놓고 턱 받히고 앉아 넋을 빼더니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좋다. 20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를 신나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극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갈 것도 아니면서 마냥 좋았다. 전에는 저녁까지 챙겨 먹고 놀다가 아이들과 함께 밤에 상영하는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토요일 밤의 즐거움이었다. 특히 여름 방학을 겨냥해 내놓는 영화는 다양해서 한여름 밤의 데이트는 늘 기다려지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극장 문을 열었다고 해도 나갈 엄두를 못 내고 두 해가 넘도록 랩탑을 품고 다녔다. 앉으나 서나 일할 때나 늘 넷플릭스와 함께했다. 새로운 영화가 올라오기가 무섭게 해치우다 보니 더는 새로운 게 없을 지경이다. 이젠 본 것 또 보는 것도 괜찮아졌다. 어제는 일하면서 전에 보았던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보고 있는데 우리 막내와 같은 또래 청년이 들어와서는 “혹시, 길모어 걸스를 보고 있나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엄마랑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했다. 아마 최소한 스무 번은 봤을 건데 여전히 보고 있다고 해서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다. 나도 세 번은 봤을 텐데 여전히 틀어놓고 일하면서 듣는다.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좋다. 

 

토요일 밤에는 XD 상영관이 매진되어서 부득이 일요일 밤에 나가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일요일은 일찍 쉬고 싶어 밤 외출은 삼가고 있지만, 며칠 전에 손님이 와서 오랜만에 멋진 영화를 보았다며 ‘탑건, 매버릭’을 꼭 보라고 강추하는 바람에 경계를 풀기로 했다. 1986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탑건에 이어 2탄이 개봉된 것이었다. 특히 영화 탑건하면 사운드트랙을 빼놓을 수 없다. 아카데미 주제가상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을 받은 밴드 베를린(Berlin)이 부른 Take my breath away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또한 톰 크루즈를 세기의 연인으로 등극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열정, 사랑과 우정, 음악 그리고 영상미까지 담겨있는 영화 탑건은 여전히 세대를 넘는 히트작임이 틀림없다. 아마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 누군가는 탑건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20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10시 15분 상영시간에 맞춰 10시쯤 집을 나섰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스웨터도 챙겼다. 언제부턴지 남편은 팝콘과 콜라 대신 마가리따를 주문한다. 커다란 잔에 빨대 두 개를 꽂아 들고 뒤따라 들어와서는 덥석 건네준다. 어디에 가든 술 냄새가 난다 싶으면 어떡해서든 마가리따를 들고 나타난다. 그러니 마가리따를 즐기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날이다 싶으면 우리 막내에게 마가리따 만들어 주라고 미리 주문한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가 만들어 주는 마가리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 틴에이져 몇 명이 우르르 들어와 우리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끌시끌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계음이 귀를 훑고 지나갔다. 아차 자리를 잘못 잡았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유튜버라도 되는지 촬영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촬영하면서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7~80년대에 서산여중고교를 다녔다. 고교얄개 같은 하이틴 영화를 비롯해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학생관람가 영화가 서산극장에 들어오면 오후 수업을 접고 단체관람을 할 수 있게 학교에서 주선해주었다. 학교에서 극장까지는 50분을 걸어야 했다. 그땐 극장 가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50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허락해주는 몇 번 되지 않는 날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었다. 그날은 축제의 날이었다. 화면에 비가 줄줄 흘러내리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상관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카세트테이프에 영화음악을 녹음해서 나눠 들으며 한동안 행복한 축제는 이어졌다. 가끔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남사친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와서 얘기하면 왜 그리 부러웠던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름밤에는 모기장 속에서, 겨울밤에는 이불 둘둘 감고 앉아 텔레비전에서 하는 토요 명화극장을 빠짐없이 보는 것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보았던 영화들이 최고였던 것 같다. 그때 그 음악을 들으면 소리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리움을 만나는 것 같아 좋다.

 

언제나처럼 20여 분은 영화 프리뷰와 광고가 흐른다. 그동안 몇 커플이 들어와 자리가 하나둘 채워져 갔지만, 일요일 늦은 시간이라 극장 안은 한산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올여름에는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여러 편이어서 여름밤의 데이트가 이어질 것 같아 설렌다. 양쪽 벽에 걸린 불이 꺼지자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톰 크루즈 인터뷰 영상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36년,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싱싱했던 매버릭 얼굴에도 세월이 지나간 흔적은 확연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아름다웠고 더욱 선해 보여서 좋았다. 

 

심야 극장에서 매버릭을 보며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 나를 만났다. 너무나 외로워서 눈물 흘리던 스무 살의 내가 여전히 예뻤다. 고결한 삶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내 서른 살의 삶도 존경하고 싶어졌다. 다 될 것 같은 자신감에 넘쳐 절망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던 마흔의 나도 안아주기로 했다. 아직도 서운함으로 인해 밤잠 설치지만, 더러는 겸손해지기도 하는 지금의 나도 사랑하기로 했다. 절망과 설렘 사이에서 유유할 수 없다는 것은 아직은 희망 따위를 믿는 나이가 아닐까 싶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알레르기  / 김미희

강아지는 떠났다
오라면 그냥 오던 강아지 말고, 강아지는
개털을 남기기 위해 개가 되어 떠난 것이다

나도 떠났다 그런데 
나는 내 방 안에 여전히 그대로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는 일만 남아 울기 좋은 내 방 창가는 
봄이 와도 괜찮을 것 같아서만은 아니다

헐렁한 브래지어를 벗고 모로 눕는다 
혼자니까 몸맵시 따위는 상관없이 내 방에서는
코를 푸는 일
  
코를 풀고 눈을 비비고 재채기를 스무번쯤하고
주룩주룩 눈물꼬를 트고

아무 짓 없이도 나른해 보이는 
창문에 발린 가로등 빛이 
옆으로 다가와 누웠던 일을 기억하는 눈치다  

차라리 개도 흔들어 털고 떠난 과다증후군
사랑앓이라 하자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잘 생기고 머리도 무척 좋은 엔지니어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좋은 대학을 갔고, 대학에서도 2년 동안 열심히 공부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3학년 때부터 친구들의 술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
    리빙 2022-06-24 
    이곳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앞으로 1년 안에 미국에 경기침체 가능성이 절반에 가까운 것으로 내다봤다.주요 언론들도 이미 경기침체에 진입했거나 그 직전에나 볼 수 있는 수치라고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주지하는 바대로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0.75% 금리인상이 지난주에 …
    회계 2022-06-24 
    내일은 6·25전쟁 72주년이 되는 날이다.전에 한 노인이 모임에서 혀를 차며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요즘 젊은것들은 6·25가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그저 달력에 빨간 날이면 노는 날이라며 좋아한다고. 전쟁의 참상을 겪은 그분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이 그들에겐 아무…
    문학 2022-06-24 
    안녕하세요! 유난히 더운 6월의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오늘날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아무리 더운 지역이여도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고 식료품들도 냉동 기술이 발달하여 장거리 이동에도 쉽게 상하지 않습니다.주제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내용인데요 과연 우주 비행사들은 어…
    리빙 2022-06-24 
    장사는 무엇이고 사업은 무엇일까? 나름대로의 차이를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다.장사는 그것이 행하여지는 지리적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근거리 원내의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사업은 그것이 행하여지는 지리적 장소가 주는 한계를 뛰어 넘어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
    부동산 2022-06-24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 바티칸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성지인 서유럽 여행은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 들이다.각 국가마다 너무나도 유명한 여행지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여행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하루도 지루할 수 없는 코스이기도하다…
    문학 2022-06-17 
    이번 주 휴람 의료정보에서는 노화의 주요 원인인 노인성 안질환 중 노안과 백내장에 대해 휴람 의료네트워크 좋은사람들 성모안과 박 성진원장의 도움을 받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노안과 백내장은 노화가 주요 원인이 노인성 안질환이다.노안과 백내장은 40대가 지나면서 주로 …
    리빙 2022-06-17 
    자동차보험 가입은 법적인 의무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고를 당하여 상대에게 클레임하려고 보면 상대편이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된다.이럴 때 내 과실은 아니지만, 자신의 보험회사에 청구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을 무보험자 피해 보상 혜…
    리빙 2022-06-17 
    한 매체가 미국에 사는 한인들을 상대로 ‘왜 미국에 왔는냐’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잘 살고 싶어서’와 ‘자녀 교육을 위해서’가 대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잘 사는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일 것이다…
    회계 2022-06-17 
    초봄에 토마토 모종을 네 그루 사다 심었다. 이곳에서도 소위 밭농사 짓는 집 치고 토마토를 안 심는 집은 거의 없다는데, 남들은 쉽게 키운다는 토마토를 난 어쩐 일인지 제대로 길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하여, 올해는 토마토 농사를 전문적으로 짓는 유튜버에게 열심히 배…
    문학 2022-06-17 
    무더운 날씨에 청량한 생수 한잔처럼 달콤한 음료도 없을 것입니다.오늘은 생수 중에서 프리미엄급 생수, 에비앙과 페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병에 물을 담아 판매하기 시작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꽤 오래전이었습니다.때는 18세기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온천 여…
    리빙 2022-06-17 
    2021년 북텍사스에서 거래된 주택의50%정도가 투자자들의 구입이였다는 통계가 나왔다.NAR(전미 부동산 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북텍사스가 투자자들의 주요 관심 도시였는데, 테란트 카운티에서 거래된 주택의 52%, 댈러스 카운티에서는 주택의 43%가 기관 투자자들의 구…
    부동산 2022-06-17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력은 거론할 필요없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깊게 퍼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특히 이를 마케팅 도구로 이용 하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비즈니스나 정치 캠페인 등이 이런 관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부문이지만…
    회계 2022-06-10 
    아침부터 설렜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어려서부터 영화라면 잠도 밀쳐 놓고 턱 받히고 앉아 넋을 빼더니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좋다. 20년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를 신나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극장이 있다는 것이…
    문학 2022-06-10 
    연하다. 부드럽다. 대게 소고기나 돼지고기의 안심 부위를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중에 조리되어 판매되는 닭가슴살, 등심 등을 먹어봐도 부드럽고 연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닭가슴살은 퍽퍽하기로 유명하고 단백질의 집약체이기 때문에 식단관리…
    리빙 2022-06-1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