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저 멀리 날려주마
페이지 정보
본문
친구와 식당에 들어섰다.
내 얼굴을 흘깃 본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보았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였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서빙하는 분이 얼음물을 병째로 갖다주셨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차가운 컵을 달아오른 볼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달궈진 얼굴은 온수매트처럼 뜨끈했다. 바깥 기온은 화씨 105도. 그런 날에 야외에서 4시간을 넘게 버티다니 텍사스의 여름 골프는 어쩌면 미친 짓인지도 모른다.
골프는 마지못해 시작했다. 몸을 최소한 움직이고 맛있는 음식은 최대한 먹는 게 행복이라 여기다 보니 체중이 불었고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운동을 미룰 수 없어 선택한 게 골프였다. 그나마 적게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골프채와 신발을 사고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스크린 골프 연습 시설, 처음 잡아보는 골프채, 낯선 골프 용어 등 배워야 할 게 많았다. 골프 장비는 너무 무거워서 차에 싣고 내리는 것도 힘겨웠다.
간단한 운동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성가셨다. 무엇보다 골프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열심히 배워보아도 몸치인 내가 따라 하려니 무척 어설펐다. 코치 선생님의 우아한 시범 동작은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기예 같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교습을 마치고 나니 마침 겨울이었다. 골프장에 몇 번 나가긴 했지만, 날씨가 풀리면 다시 하자고 핑계 대며 골프채를 창고에 깊숙이 넣어 두었다.
골프장을 다시 찾은 것은 4년이나 흐른 뒤였다. 당시 코로나로 사업이 어려웠던 것과 겹쳐 집안에 큰 시련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그때 나는 휘몰아치는 바람 속 격랑에 휩쓸린 작은 배 같았다. 파도를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니 졸리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안 자고 안 먹으니, 얼굴이 상했고 체중이 줄었지만,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어지러운 잡념 속으로 침몰해 가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앞 골프장에 나와 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앞뒤 생각 없이 말했다. 거기로 갈 테니 그대로 있으라고. 그 길로 달려가 회원 가입을 했다.
밖으로 나가 무언가 다른 것을 해야 했다. 머릿속에 끓어 넘치는 생각에 찬물을 부어주고 싶었다.
그날부터 시간만 나면 골프장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 친구도 답답한 상황 속에 있어서 피차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머릿속을 비우고 작은 공에 집중했다.
티박스에 서서 티 위에 올라앉은 공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심장 박동은 잠잠해졌다.
두 다리로 중심을 잡고 단단히 서서 상체를 최대한 돌리며 드라이버를 들어 올렸다. 잠깐 숨을 참았다가 내쉬며 꼬았던 몸을 풀어내어 힘차게 공을 쳐올리면 클럽 헤드에 경쾌한 금속성 울림을 남기고 공은 저 멀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페어웨이 아닌 숲속에 떨어져 공을 잃게 되거나 잘 맞지 않아 땅볼로 굴러가도 상관없었지만, 어쩌다 좋은 방향으로 거침없이 날아가 주면 나는 함박웃음이 터졌다. 돌멩이같이 가슴을 짓누르던 생각 한 뭉치가 빠져나가는 것 같아 후련하였다.
우리는 자연 속에 섞여 들어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았다. 비가 간간이 내리는 골프장이 나는 좋았다.
잔디가 젖으면 공이 잘 튀어오르지 못하고 신발이며 클럽에 진흙이 잔뜩 묻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가버린 텅 빈 골프장에서 고요하게 빗소리를 듣고 풀 내음을 맡으며 공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땐 하늘과 땅이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린 근처에 앉아서 놀고 있는 오리들을 피해서 어프로치샷을 하거나 얕은 호수에 빠진 공을 건져 올리기 위해 수초들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기울면 아찔하게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 가득 펼쳐져 있곤 했다. 자연 속에서 노는 동안 괴로움이 서서히 무뎌져 갔다.
자연은 그 자체로 놀라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하나님이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시는 것 같았다.
그 새로운 일에 전념하는 동안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문제만 보던 시선을 분산시키니, 오히려 해결할 여유도 점차 생겨났다. 내 인생의 큰 시련은 예기치 않던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곤 했는데, 그럴 땐 종종 생각지 못한 것에서 그렇게 위로를 발견해 왔다.
고난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은 수호천사처럼 번번이 나를 지켜냈다. 세상에는 잠시 시선을 돌려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자연도 있고 예술도 있고 할 일도 그래서 있나 보다.
내일도 새벽부터 골프 약속이 잡혀 있다. 여전히 골프 가방은 너무 무겁고 장비는 거창하다. 내 얼굴은 빨갛게 익을 것이고 언제쯤 잘하게 될지 기약도 없다. 하지만 나는 스코어에는 관심이 없다.
나에게 골프장은 점수를 내는 곳이 아니라 잡념을 날리는 곳이다. 집중하여 날리고 또다시 집중하여 날린다.
내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수백 개 고뇌야, 모두 오너라.
저 멀리 날려주마!
백경혜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