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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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 제주를 찾았다.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 마을 북촌리에 가서 북촌 초등학교와 너븐숭이 소공원을 돌아보고 제주시에 있는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
현기영 작가의 최근 장편 소설 <제주도우다>를 읽고 그의 초기 작품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과 <제주도우다>에 나오는 4·3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리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다.
4․3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초래한 북촌리 학살 사건은 북촌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들과 밭에서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날한시에 학살된 일이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많은 흔적이 있고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그 자리에 지어졌다. 기념관에 있는 제주 4·3 연구소가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 ~ 100여 명 단위로 끌려 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너븐숭이 소공원에는 널브러진 시체를 상징하듯 비석들이 길게 포개져 누워있었고 비석에는 <순이 삼촌>에서 따온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오백 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당시 일주 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사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 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 먹고 다리 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 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름들을 밀어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 안들어가젠 밭담위에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흘리멍 살려달렌 하전 모양입디다.”
“쯧쯧쯧, 운동장에 벳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 놓으면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죽은 사람이 몇백 명이나 될까?”
비석의 글을 읽으며 75년 전 제주의 4·3을 생각하게 되고 최근에 발표된 현기영 작가의 장편 소설 <제주도우다>를 생각했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부터 4·3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4·3의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안창세’의 목소리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4·3 이란 75년 전 1948년 4월 3일 군, 경, 서북청년단의 횡포와 잔혹 행위 그리고 남한의 단독선거에 저항해 일부 도민이 무장 궐기했던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빨갱이 잡기’가 전개되고 그해 11월17일에는 계엄령하에 제주도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자행됐다.
남로당 쪽의 무장 게릴라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있지만 주로 군경에 의해 어린아이들부터 할머니까지 죄 없는 양민이 3만 혹은 5만 명 이상 희생됐다.
불타거나 파괴된 가호가 15,228호, 피해 가옥이 35,921동에 이르렀고 이재민 수는 당시 전체 인구의 35%가량인 91,732명이라고 나타났으나 실제로는 인구의 절반인 1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군 비밀문서가 과장 집계한 빨치산(무장 유격대)의 숫자가 250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 ~ 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희생자의 숫자는 빨치산의 색출을 빙자하여 무려 7년 7개월 동안 계속된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다.
현기영 작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제 75년이 지나서야 4·3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고 무고히 희생된 그 많은 사람의 혼백을 위로하고자 4·3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공원에는 약 만 오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연고자가 모두 사망해 이름도 못 올리고 희생된 많은 사람을 상징하는 이름 없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동백꽃의 아름다운 낙화에서도 목 잘린 채 뒹굴던 머리통을 생각하게 하는 그 잔인함. 얼마나 많은 혼백들이 아직도 제주의 칼바람 속을 헤매고 있을지...
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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