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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연(緣)연(鳶)연(蓮) … 바람이 숨 죽이자 꽃이 되어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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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카톡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 6시 30분에 먼 길 떠나셨다는 부고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떠나신 거네요. 그래서 비가 그치고 세차게 불던 바람이 조용해졌나 봅니다.
본향은 어떤 곳인가요. 그리고 얼마나 먼 곳인가요. 벌써 당도하신 건가요. 떠날 차비는 얼마나 준비하면 되는 걸까요. 또, 안녕을 고하는 시간은 얼마면 적당할까요. 떠나신 지금도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목요일이었을 거예요. 일요일에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고 나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종일 일을 하면서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뭔가 빠트린 거 같은 어딘지 모르게 허당에 서 있는 거 같았습니다.
뭐가 그리 바빠서 안부 인사도 자주 못 하고 살았을까요. 움직이실 수 있을 때 한 번 더 뵙고 식사라도 한 번 더 대접해 드릴 걸 그랬다는 자책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냥 들려서 얼굴이나 보여주라던 사모님 말씀이 종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리 급하게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왜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내일 말고 오늘 들러서 선생님께 고마웠다고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일 일을 하면서 선생님과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2001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용히 두 아이 키우며 일만 하던 저는 예총 모임에서 문학회 회장(지금은 고인이 된)을 만났지요. 제가 문학소녀였다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 그 친구에게 이끌려 문학회 모임에 따라갔었지요. 그곳에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적당한 거리에서 묵묵히 지켜보시며 필요할 때마다 당근을 주듯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특별한 것도 없는 그저 “좋아요.” 내지는 “괜찮은데요.”라는 말씀이 다였지만, 왠지 그 말은 믿어도 될 거 같았습니다. 진심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어딘지 모르게 저를 세워주는 것 같아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단발머리 문학소녀인 양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시 한 편씩을 지어서 낭송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생각도 없던 저에게 선생님은 시들을 묶어서 보내달라고 하셨지요. 왜냐고 묻지도 않았던 나는 2005년 봄에 시인이란 딱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시편들을 모아 응모를 해주셨던 것이지요.
등단하고 나면 책임감이 생겨 더 열심히 시를 잘 짓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 덕분에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탄력을 잃고 늘어질 때마다 불러서 소주잔을 채워 주시며 길을 잃지 않게 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부족한 게 많은 제가 혹시라도 뒤처질까 봐 숙제 검사라도 하듯 살피시고는 잘하고 있다고 다독이며 글쟁이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인연이란 시작이 아닌 끝이 좋은 인연이라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자만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하지요. 선생님, 그럼 저는 현자에 속하는 거네요. 이런 문장들을 떠올리며 종일 선생님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늘 엄지를 올리시던 그 마음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제게 용기라도 보태 주려고 그러셨지요. 오늘은 선생님 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일을 접고 선생님께 달려가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칙칙한 병실에 꽂아 놓을 꽃을 보는데 이게 사모님 말씀대로 마지막 인사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드시지 못한다고 했지만, 따뜻한 호박죽이랑 잣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선생님께 달려가는 내내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아니길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날 선생님 모습은 많이 야위어 있었지만, 맑아 보여서 다행이었습니다. 심중에 있던 말들을 하기에 좋았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께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선생님을 만나서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늘 제 편이 되어 주셔서 힘이 났습니다. 많은 일을 함께하면서 선생님과 같이했던 순간순간이 행복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부족하나마 저의 길을 찾게 되었고, 그 길을 묵묵히 가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고백을 다 들으시며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만나게 되어 좋았다고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고맙다고 하시며 또 엄지를 올려 답을 하셨습니다. 정말 선생님과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가져간 죽을 드셨지요.
비록 이유식 먹는 아기처럼 겨우 세 번 받아 드셨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도 제대로 넘기시지 못하면서 선생님은 저를 위해 드신 것이지요. 제 마음에 대한 답을 그렇게 보여주셨지요.
맛있다며 또 한 번 엄지를 올리셨습니다. 그게 바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지요. 그것이 엊그제 일인데 오늘은 이승이 아닌 먼 곳으로 떠나신 거네요.
선생님, 어디쯤 가고 계시나요? 부디 그곳에서는 편한 모습으로 훨훨 날아다니세요. 이젠 컴퓨터 키 누르기 전 두 손 잡고 어르신도 찾지 마시고 독수리 타법에서 벗어나 못 박힌 검지는 쉬게 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 “연(緣)연(鳶)연(蓮) … 바람이 숨 죽이자 꽃이 되어 돌아왔네”는 손용상 선생님의 2023년 해외시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으로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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