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 믿고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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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페이스북에 캡처한 사진과 함께 스미싱을 조심하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아는 이의 핸드폰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자기가 재혼을 하게 되었으니 와서 축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짜인 줄 알고 하마터면 첨부한 주소 링크를 누를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읽어보니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문구였다. 만일 아는 사람이 그런 문자를 보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나도 눌렀을 것이다. 스미싱(Smishing)이란 말이 생소해서 검색해 보았다. “문자메시지(SMS)와 피싱(Phishing)의 합성어로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피싱”이라고 적혀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의 전화 번호로 경조사 초대장 등을 주소 링크와 함께 보내는데, 링크를 누르는 순간 악성 코드에 감염되어 금융정보나 금전피해를 당하는 신종 사기 수법이었다.
한동안 자녀의 전화번호를 이용해 부모에게 문자를 보내서 금융사기를 치는 보이스 피싱이 극성이었다.
가까운 지인이 당했는데, 마이너스 통장까지 탈탈 털려 큰 피해를 입었다. 그분은 충격으로 대인 기피증이 생겼고 어리석게 속은 자신이 싫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한동안 앓아 누웠다.
자식 앞에서 약해지는 게 부모라는 걸 이용해 나쁜 짓을 일삼는 무리들 때문에 피해자가 속출하는데, 근절이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그분도 평소에 보이스피싱 같은 걸 왜 당하냐, 딱 보면 모르겠냐고 큰소리쳤던 사람이다. 당하고 싶어 당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자기도 모르게 말려드니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전 이메일 사기가 한창일 때 사촌동생 이름으로 다급한 이메일이 온 적 있다. 중동에 억류되어 있으니 돈을 보내 달라던 동생은 집에 잘 있었다.
속한 곳이 많다 보니 생활비 중에서 경조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결혼식, 장례식, 졸업식, 출판기념회 등 다양하다. 대부분 문자로 오는데, 게 중에는 몇 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경조사 생길 때만 연락하는 얌체족이 끼어 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양심 없는 인사라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일일이 챙겨주었는데, 코로나라는 최악의 터널을 지난 후 생각이 좀 달라졌다.
전 세계가 거리두기를 하며 공포에 떨던 시기에 큰 수술을 하고 철저히 격리된 곳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그런지 마음문이 좀 닫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 한 번 묻지 않았던 사람이 경조사 문자를 보내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보이스피싱도 날로 진화하여 수법이 다양해졌다. 부고장, 초대장, 건강관리공단, 택배 등을 사칭한 것들이 많은데 잘못 눌러 앱이 깔리면 개인정보가 빠져나가 피해를 보게 되는데 연간 피해액이 억 단위라 하니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일순간에 다 털리고 빈 껍데기만 남은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그런 문자를 받으면 확인을 먼저 하여 피해를 줄이는 게 최선인 것 같다.
단체장으로 봉사하다 보니 문의 전화가 오기도 해서 처음엔 저장 안 한 번호도 받았는데 스팸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안 받는다. 보이스피싱 기사를 읽고 나니 겁이 나서 문자메시지 여는 것도 무섭다.
어제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보통은 하다 마는데 계속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해 버렸다. 일하다 보니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곳에 살다 알칸사로 이사한 지인의 아들이었다. 깜짝 놀라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에 볼일이 있어서 온 길에 보고 가려고 걸었던 거였다. 늘 지인과 통화를 해서 아이 전화번호는 몰랐다. 당일치기로 온 거라 시간이 없다고 해서 머리도 못 감고 튀어 나갔다. 먹고 싶었다는 짜장면을 사주고, 먹는 동안 투고해 갈 순대와 족발도 주문했다. 그곳에는 그런 게 귀하다. 주머니 털어 용돈을 줬더니 자기도 돈 번다며 손사래를 쳤다.
지인의 아이들은 나를 앤 이모라고 부른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 없으면 앤 이모 집으로 가면 된다고 굳세게 믿었다. 그러던 아이들이 자라 큰딸은 결혼했고, 둘째는 대학 졸업 후 약국에서 일하고, 셋째 딸은 대학교 1학년이고, 막내딸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셋째는 우리 부부가 산 바라지를 해 주었다. 지인은 우리 딸내미 베이비씨터였다. 그런 인연으로 만나 이십 년 넘게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지인에겐 내가 친정 언니인 셈이다.
처음 만났을 때 기저귀 차고 우유병을 빨던 아기가 23살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있는데, 내 눈엔 아직도 아이 같아 보였다.
말수 적은 녀석이 반가운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이제는 약국에서 주사도 놓는다며 배시시 웃었다. 잘 커 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이 되는 건 아니다. 언제 어느 때 오든 맨발로 뛰어나가 안아줄 생각이다. 나는 앤 이모니까.
먼 데서 왔는데 하마터면 스팸인 줄 알고 안 받아서 못 보고 갈 뻔했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험해져서 전화도 마음대로 못 받는 세상이 되었을까. 의심하고,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세상이 참으로 불편하다.
믿고 살아도 되는 세상은 어디 있을까.
대문을 안 잠그고 자도 아무 일 없었던 시절로 이사 가고 싶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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