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은 참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의 색깔 아래 모이게 하고, 하나의 노래를 부르게 하며,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만든다. 특히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고, 조국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며,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축제다.
지난 목요일 저녁, 달라스의 한 응원장. 200명이 조금 넘는 교민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사람, 붉은 머리띠를 맨 청년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 그리고 2002년의 함성을 기억하는 중장년들까지. 세대는 달랐지만 마음은 하나였다. 응원장이 붉게 물들어 갈수록 기대감도 함께 커져 갔다.
그날의 상대는 체코였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 응원장의 공기는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전반전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양 팀은 서로의 빈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공격은 날카로웠고 수비는 견고했다. 선수들은 상대 수비의 허점을 파고들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고, 상대 역시 쉽게 공간을 내주지 않았다. 마치 노련한 장기 고수들이 상대의 수를 읽으며 빈틈을 찾는 것처럼 그라운드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골은 없었다. 그러나 지루한 0대0은 아니었다.
공이 상대 진영으로 향할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고, 상대의 역습이 시작되면 모두가 숨을 죽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응원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스코어는 0대0.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승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은 선제골을 허용했다. 순간 응원장은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울려 퍼지던 함성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었다. 혹시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응원장 전체를 짓눌렀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어.” 누군가는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손에 쥔 태극기는 어느새 땀에 젖어 있었고,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 갔다. 가슴은 조여 왔고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한 번의 패스에 희망을 걸었다가 한 번의 실수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흘러갔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눈빛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점골이 터졌다. 응원장은 다시 살아났다. 굳어 있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포기 직전까지 갔던 마음속에 다시 희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진짜 드라마는 이제 시작이었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질 무렵. 기적처럼 역전골이 터졌다. 골망이 흔들리는 순간. 응원장은 폭발했다. 누군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고, 누군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쳤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그 순간이었다. 응원장 한쪽에서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둥둥! 잠시 후 꽹과리가 힘차게 화답했다. 쟁! 쟁! 쟁쟁쟁!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다는 듯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군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대~한민국!” 순간 이백여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대~한민국!” 북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둥둥둥! 둥둥둥! 꽹과리는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쟁쟁쟁! 쟁쟁쟁! 그리고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외쳤다.
“대~한민국!” 그 함성은 단순한 응원 구호가 아니었다. 선제골을 내주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보내는 감사였고, 역전을 이루어 낸 투혼에 대한 찬사였으며, 멀리 타국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이 하나의 조국 아래 다시 만나는 감격의 언어였다. 그 순간 응원장은 더 이상 달라스의 한 건물이 아니었다. 광화문도 아니고, 상암월드컵경기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대한민국이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이백여 개의 심장은 하나의 심장이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방금 전 장면을 휴대폰으로 다시 돌려 보았고, 누군가는 처음 만난 사람과 악수를 나누며 승리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환한 얼굴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2대1. 전광판에는 단순한 숫자만 남았다. 그러나 그 숫자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실점의 아픔과 불안.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긴장.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의 투혼. 그리고 역전승이 선사한 벅찬 감동. 그 모든 것이 한 경기 안에 담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월드컵의 진짜 감동은 승리 그 자체보다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희망을 품고, 같은 순간에 울고 웃는 것. 그것이야말로 월드컵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다음 주 목요일. 두번째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그날까지 사람들은 오늘의 역전승을 이야기할 것이다. 식당에서도, 교회에서도, 마트에서도 자연스럽게 축구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선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오늘의 감동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와 설렘 속에서 우리의 붉은 심장은 계속 뛰고 있을 것이다. 북소리처럼 힘차게. 꽹과리 소리처럼 뜨겁게. 태극기처럼 자랑스럽게. 다음 주 목요일 경기의 휘슬이 울릴 때까지. 아니, 태극전사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동안 내내.
달라스의 붉은 심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다시 확인했다. 멀리 떨어져 살아도 조국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한민국을 향한 사랑은 거리로도, 시간으로도 결코 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요동친다.
붉게. 뜨겁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