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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백경혜] 친정

Last updated: 1월 3, 2025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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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선물로 들고 간 간식들을 좋아하셨다. 그중 몇 가지는 방으로 가져가 숨겨두셨다. 치매 증세 중 하나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 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간식 봉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먼저 사다 놓은 간식 옆에 내 선물이 나란히 놓였다. 구순을 넘긴 아버지는 기억력이 조금 흐려지셨지만, 소통에는 아직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여러 종류의 나물을 밥상에 올리셨다. 두릅, 미나리무침, 쑥갓무침, 머위무침과 쑥국은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향긋한 나물로 차려진 풀빛 밥상을 보니 내 나라에 돌아온 실감이 났다.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라 더 귀했다. 

  나는 나물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데쳐서 무쳐놓으면 흑록색으로 늘어진 모양새를 하고 마니, 맛과 향만으로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유난히 맛있는 것은 이름을 물어보지만, 그것도 머리에서 머물다 사라지기 일쑤이다. 조리해 먹을 것 같지 않다고 무의식이 알아서 기억을 삭제하는 모양이다. 어머니 음식이 기다리는 친정이 없다면 나물 이름을 더 열심히 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새로 지어 들어갔으니 사십 년 된 집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의 일부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걸린 액자 속엔 어린 세 남매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서 난 단발머리 초등학생으로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동생을 태우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자전거를 빙 둘러 그리운 동네 친구들과 언니가 서 있다. 아버지 환갑 기념 가족사진도 있다. 몇 해 전 결혼한 조카가 돌 지난 아기로 할아버지 품 안에 안겨 있다. 환갑 때 아버지는 너무 젊어서 낯설기까지 하다. 

  어머니는 오래된 내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장롱에는 이십 대에 구입한 내 캐시미어 코트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여기저기에 좀이 쏠아 작은 구멍들이 보였다. 오래된 가방의 스웨이드 안감엔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못 쓰게 된 내 옷과 소지품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으니 멈추어 있던 시간의 한 부분이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친정에서 며칠은 마냥 반갑고 즐겁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힘들어진다. 다 커서 독립한 새가 좁은 어미 새 둥지로 다시 비집고 들어온 꼴이리라. 귀국한 다음 날부터 부모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추우니까 옷을 더 입어라.” “친구들은 왜 그렇게 많이 만나고 다니느냐.” “저녁에 일찍 일찍 들어와라.”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딸 어디가 아까워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 분만 적적하게 지내던 중에 모처럼 집중할 대상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재미가 진진한 부모 역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더 껴입으라는 성화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갱년기 딸내미의 목덜미를 보여드리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양심대로 행동하는 분이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다.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평생 지켜보았다.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고 하셨다. 평생 미덥지 않은 자식으로 비쳤나 보다. 하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하실 때는 말 문이 막혔다. 삼십 년 이상 세대 차이가 나는 데다 외국에서 십여 년을 떨어져 살았으니,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팔십 대 중반쯤부터 부모님은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노쇠해지신다. 아버지는 올해로 구십일 세가 되셨다. 윗니가 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틀니를 싫어하셔서 앞니로만 음식을 씹으셨다. 어머니가 무른 음식으로 식사를 준비하지만, 다양한 음식을 드시지 못하여 작년보다는 좀 야위었다. 몇 해 전 찾아온 뇌경색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하루 몇 시간씩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아침에 조반을 드시고 나면 현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얌전한 아이처럼 센터 셔틀버스를 기다리셨다. 아버지의 등이 작년보다 더 조그마해졌다. 


   친정(親庭)은 시집간 여자의 친부모가 사는 집을 말하지만, 그 한자를 살펴보면 ‘친할’ 친(親)자에 ‘정원’ 정(庭)자이다. 친근하게 쉬었다 올 수 있는 정원 같은 곳이라는 뜻일까. 내게 친정은 언제나 환영받고, 무엇도 기꺼이 내어주는 너그러운 곳이다. 정원 정(庭)을 쓴 이유는 출가한 여인이 마음을 접고 시집간 가정에 집중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 뜰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일 뿐, 성인이 되어 떠나간 자식과 부모는 그렇게 분리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약하디약한 두 분을 두고 그곳을 떠나왔다. 안 보면 잊어버리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은 자식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일이다.


  내 하나뿐인 ‘친근한 뜨락’은 점점 더 작아지고 쇠퇴해 간다. 나물 이름 따위는 외우지 않으려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꾸만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신다. 가족으로 얽혀 산 세월의 길이만큼 회복되지 못한 상처도 남아 있지만, 스러져 가는 부모님 인생을 생각하면 후회 없이 사랑만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아버지가 눈에 밟혀 내년 이맘때는 또 비행기 티켓을 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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