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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백경혜] 레테, 망각의 강

Last updated: 9월 6, 2025 5: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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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나와있다. 

  서울이 이렇게 더웠던가. 조그만 양산 그늘을 믿고 주민센터와 은행 일들을 보러 동네를 돌아다닌 날, 집에 와 거울을 보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목덜미까지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찜질방 불한증막에서 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마지막에 들렀던 반찬 가게 사장님이 왜 얼린 생수병부터 건네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거리를 조금 걷고 냉방이 되는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탔을 뿐인데 겨드랑이가 종일 끈적거린다. 거리에 나처럼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걸 보면 달라스가 아무리 뜨겁다고 해도 찜통 같은 이곳 날씨에는 따로 적응해야 하나 보다.


  매일 서울과 인천을 오가고 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젠 외출 순서도 정해져 있다. 집을 나서기 전,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음악을 재생시킨다. 주변 음 차단 기능을 켜 음악으로 무장한 다음, 대문을 나서면, 후텁지근한 공기가 폐부 깊이 밀려든다. 가끔 안내 방송을 놓쳐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었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세상을 차단한 채 지내고 싶다. 

  역으로 가는 길엔 작은 공원이 있다. 말매미가 찌르르 울어대는 나무 그늘을 지날 때면 근처 벤치를 유난히 좋아하던 동네 어르신이 떠오른다. 치매 증세가 있어도 산책을 꾸준히 하시던 분인데,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전철은 두 번 갈아탄다. 자리에 앉으면 맞은편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제나 무심한 표정이다. 어쩌다 앞 사람 눈과 마주치면 시선을 내려 신발을 본다. 신발은 때로 주인의 삶을 말해 준다. 휴가 나온 군인의 스웨이드 가죽 군화에는 흙 얼룩이 묻어 있었다. 훈련소 연병장을 달리던 흔적일까. 발목까지 단단히 조여 묶인 신발 안 온도는 몇 도일까. 담담한 얼굴과 단정한 군복은 절제되어 있어 강인하게 보였다. 그 옆 크림색 구두는 앞코가 까맣게 벗겨져 있었다. 무엇을 걷어찼을까. 씩씩한 아가씨인가 보다. 내 검정 운동화는 몇 해 전 귀국 선물로 어머니께 사 드린 것이다. 아끼느라 신지 않고 남겨두신 걸 이제 내가 신게 되었다. 


  신발이 삶을 드러내듯, 자리가 사람의 사정을 말해주기도 한다. 전철 안, 눈에 띄는 그 자리를 볼 때마다 몇 해 전 일이 떠오른다. 붐비던 전철, 몇 정거장을 서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하면서 자리를 내주었다.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좌석을 양보한 게 이상했지만, 고단한 참에 얼떨결에 안고나서 방금 들은 말을 떠올렸다. “몰랐어요…” 라고 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일까. 주변을 둘러보다 내가 앉은 자리만 진홍색 의자인 걸 알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평소 어머니가 “배 좀 내밀고 서 있지 마라” 그렇게 얘기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일어나자니 더 민망할 것 같아, 그냥 나이 든 임산부인 척 조용히 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의식적으로 이런 기억을 떠올린다. 창피했던 그 일을 기억하면 조금 웃을 수 있다. 그리고 전철 맞은편 자리에 앉은 승객의 신발을 관찰한다. 거리를 걸을 땐 무더위에 집중하며 손수건으로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는다. 음악으로 세상 소음을 차단한 뒤 이어폰 차단 모드도 뚫고 들어오는 대단한 매미 소리를 듣는다. 요즘 뵐 수 없는 동네 어르신을 떠올린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나는 것들로 마음을 분산시키는 것은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한 나의 본능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금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 병세가 깊어 하루하루가 위태롭다. 돌아보면, 어머니는 평생을 깨끗하고 욕심 없이 사셨다.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내가 어머니처럼 멋지게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간지러운 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더니 요즘은 부쩍 자주 애틋한 말을 건네신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힘겹게 내미는 그 진심에 나는 애가 탄다. 어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딸이어서 좋았어.”

 

  내가 홀로 머무는 친정집엔 위독한 어머니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병실에서 하루를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떠오른다. 오랜만에 귀국한 딸이 혹시 전철을 잘못 탈까 봐, 아버지는 자주 전철역까지 따라 나오시곤 했다. 늦은 귀가에는 휴대전화가 불이 나도록 전화하셨다. 제 자식 위한다고 부모 버려두고 진즉에 태평양 건너 떠나 버린 딸이 뭐 그리 귀하다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쓰던 밥공기에 밥을 담고, 눈에 익은 어머니 접시들을 꺼내 늦은 저녁상을 차린다. 어머니와 이 식탁에 다시 함께 앉을 수 있을까. 홀로 앉은 저녁은 몹시도 적막하다. 

  

  한 분씩 떠나가는 기가 막힌 요즈음, 나는 오늘도 살아내기 위해 망각의 강,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삼킨다. 

  그리고 강물에 젖은 발을 털고, 다시 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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