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아직 영화 ‘암살자(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나쁜 영화인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영화인지 아닌지를 단정할 생각은 없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작품 전체를 재단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편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개된 예고편과 감독·제작진의 인터뷰, 영화를 관람한 언론의 보도와 개봉 이후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지켜보면서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질문 하나가 생겼다.
• 영화적 상상력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실제로 사람이 죽은 역사적 비극을 우리는 어디까지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써도 되는 것일까.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총성이 울렸고 육영수 여사가 피격돼 숨졌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비극이다.
50여 년이 흐른 지금 ‘암살자(들)’은 다시 그날을 불러냈다. 언론에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영화는 사건의 배후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지만, 일부 등장인물을 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측 또는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계획했을 가능성을 하나의 가설로 제시한다.
• ‘창작의 산물’이라는 울타리
논란이 커지자 제작진은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 사실을 부정·왜곡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밝혔다. 공개된 기록과 자료, 서적과 다큐멘터리 등을 조사해 실제 사건과 인물에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결합했다고 설명하면서 “작품을 창작의 산물로만 바라봐 달라”고 했다.
바로 그 말 앞에서 멈춰 서게 된다.
물론 영화는 창작의 산물이다. 그러나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고 역사적 기록과 자료를 토대로 했다고 밝힌 작품이라면 순수한 허구와는 다른 책임도 함께 생기는 것 아닐까.
역사적 사실과 기록은 작품에 현실성과 무게를 더하는 근거가 되고, 논란이 일어났을 때는 다시 ‘창작의 산물’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 20년 만에 영화로 다시 제기된 의혹
이런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도 아니다.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육영수와 문세광’을 통해 당시 총탄과 수사기록을 분석하고 중앙정보부의 사전 인지 여부, 문세광의 배후 등에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에도 새로운 의혹을 추적했다는 평가와 함께 결론 없이 의혹만 키운다는 비판이 나왔다.
20여 년이 지나 비슷한 질문이 이번에는 대규모 상업영화의 옷을 입고 다시 대중 앞에 등장한 셈이다.
물론 역사는 끊임없이 질문받아야 한다. 새로운 자료와 증거가 발견된다면 기존의 역사적 평가도 다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질문과 의혹은 다르다.
실제 죽음이 존재했던 사건에서 실존 인물에게 중대한 의혹을 던진다면 그 질문에는 그만큼의 근거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외교사료관의 수사기록과 당시 수사·재판 기록 등을 근거로 영화에서 논란이 된 탄피 문제와 중앙정보부 개입설 등에 반박했다. 이것 역시 재단 측의 주장인 만큼 자료를 놓고 검증할 문제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원칙의 문제다.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 위에 올려 수많은 관객에게 보여준 뒤 “특정인을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창작자의 책임은 끝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난다고 관객에게 남겨진 이미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망자는 자신에게 던져진 의혹에 반론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날의 죽음을 기억하고 아픔을 안고 살아온 유족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했을 뿐’이라는 방식이 자칫 ‘아니면 말고’식 의혹 제기와 무엇이 다른가를 묻게 된다.
• 내 편과 네 편에 다른 잣대인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다. 영화적 상상력을 금지하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 역시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조금 불편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정치적 위치가 정반대인 다른 전직 대통령이나 그 가족이 겪은 실제 비극을 소재로,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을 사실과 허구 사이에 배치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그때도 똑같이 ‘영화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존중하는 인물에게 제기된 확인되지 않은 의혹에는 분노하면서, 싫어하는 인물에게 제기된 의혹에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원칙이라 하기 어렵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원칙이라면 내 편과 네 편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인물의 명예와 유족의 아픔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역시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좌우 진영의 논리를 떠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고 믿는다.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소비하지 않는 것, 이미 세상을 떠나 스스로 반론할 수 없는 사람을 다룰 때 한 번 더 신중해지는 것.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아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도 같은 답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의혹을 던져도 되는 거대한 각본집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최소한의 책임과 예의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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