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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고대진] 유년의 기억, 판포 널개 마을에서

Last updated: 12월 13, 2024 1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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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타원형의 섬 제주도에 가면 동쪽 끝에 해돋이를 보는 곳으로 유명한 일출봉이 있는 성산면이 있고, 서쪽 끝에는 해넘이를 보는 곳으로 잘 알려진 수월봉이 있는 한경면이 있다. 제주시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33킬로미터, 한경면으로 들어서는 마을이 필자가 낳고 초등학교 일학년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판포다. 판포라는 이름이 근처에 있는 ‘애월’이나 ‘월령’같이 듣기에 예쁜 이름이 아니어서 우리 말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옛날에는 ‘너른 들의 지형과 포구’를 갖춰다 해서 ‘너른개’ 혹은 ‘널개’로 불렸다고 했다. 우리말로는 ‘널게마을’인 셈이다.  널개마을 ‘중동’에 있는 우리 집을 나오면 해발 93미터의 새끼 화산 ‘널개오름’이 보이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검은 돌담을 따라 10분쯤 걸어가면 내가 다니던 판포 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옆으로 ‘까마귀 동산’이라는 언덕을 지나 200미터쯤 바다로 내려가면 ‘모살물’이라는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가 있고, 화산 용암이 식으며 형성된 넓은 현무암 터에 ‘화상물’ 이란 바다와, 조금 더 동쪽으로 물이 깊은 ‘무섬물’이라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고 바다마다 이름이 있고 이름에 따르는 특성이 있었다. ‘모살물’은 수영을 잘 못 하는 아이들이 놀던 모래밭이고 놀이터였다. ‘화상물’이나 ‘무섬물’에서는 ‘긍이’(게의 제주도 사투리)나 고기를 잡거나 또 ‘무꾸럭’(문어의 사투리)을 잡기도 하는 곳이었다. ‘모살물’ 서쪽에는 ‘엄수개’라는 포구가 있는데 바닷가에 ‘산물’이라 불리는 단물이 솟는 샘이 있어 해녀들이 몸을 씻기도 하고 또 마실 단물을 길러 오기도 하는 곳이 있었다. 포구에는 고기잡이를 하려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하고 있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까마귀 동산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댑바람’(북풍)이 심하게 불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었다. 동산 한편에는 검은 돌무더기가 높이 쌓여 있어 그 위에 올라서 바다를 보면 검은 현무암에 부딪히는 거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가와 짙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수평선까지 뻗쳐 있는 것이 보이고 바닷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화산섬 비양도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인다. 특히 해거름에는 ‘널개 마을’ 앞 너른 바다를 노랗게 빨갛게 물들이면서 해넘이가 시작되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의 비경 중 하나다. 해거름이 지나 땅거미가 지면 멀리 비양도에서 등대가 반짝이기 시작하여 지나는 배들의 밤길을 안내한다. 


내가 살던 동네 한가운데에는 ‘폭낭’(팽나무)이 있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여름 더위를 피해 ‘낭아래’(나무아래의 사투리)서 모여 쉬고 놀았다. 가끔 폭낭 근처에서 머리와 턱을 천으로 감싸고 다니던 ‘모로기 할망’(말을 못하는 할머니)을 보곤 했는데 어릴 때는 말도 못하는 정신이 이상한 할머니라는 생각만 했다. 당시는 어느 마을에나 4·3 때 총을 맞거나 집단 학살에서 살아남아 정신이 이상해진 ‘삼춘’들이 한둘이 있었는데 ‘모로기 할망’도 그런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최근에 인터넷을 통해 이 할머니가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진아영 할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바다에도 이름이 있고 밭이나 연못에도 꼭 이름을 붙이는 제주에서 어여쁜 이름 ‘진아영’을 모르고 ‘모로기 할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니… 너무 미안해서 사연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진아영 할머니는 1914년 한경면 판포리에서 태어나 해녀로 일하며 오빠 내외의 농사일을 돕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9년 1월 12일 어두운 밤, 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이들을 피해 사람들은 대숲이든, 굴 안이든, 나무 뒤에든, 몸을 감출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숨었다. 집이 불타고 마을이 사라졌지만, 목숨을 지키기 위해 누구 하나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아영은 집에 있는 음식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향했고, 부엌의 곡식 항아리를 찾아 들고 다시 텃밭을 향해 달렸다. 그때, 아영은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턱을 잃었다. 아영은 사라진 턱을 가리기 위해 무명천으로 턱을 감쌌다. 밤이면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악몽을 꾸고, 옆집에 갈 때조차 문을 잠가야 했다. 그렇게 무명천 할머니는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삶을 견뎌 냈다. 부상당한 후엔 부모님을 여의어 사촌과 언니가 있던 옆 마을 월령리로 옮겨와 여생을 보냈는데 턱 부상으로 인해 먹는 것도 어려워 죽으로 연명했으며 이로 인해 늘 위장병과 영양실조가 따라와 고생했다고 한다.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약과 링거에 의지하여 살아야 했으며 턱이 없어 말을 못하니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했다. 부상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다른 이들 앞에서 절대로 무언가를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대문과 방문에는 늘 자물쇠를 걸고 다녔다 한다.


어릴 적 내가 만났던 ‘모로기 할망’은 월령마을로 이사하기 전에 판포에 사시던 50세 정도의 진아영 할머니였다. 제주 4·3의 상처로 인생을 잃어버렸던 진아영 할머니는 2004년 9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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