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백경혜] 폭풍 속에서 농담을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5-03-14 11:22

본문

백경혜 수필가
백경혜 수필가

오전 다섯 시쯤 번쩍이는 섬광과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줄기 때문에 커튼을 젖히고 밖을 살피기도 무서웠다. 커튼을 살짝 들고 빼꼼히 내다본 풍경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작달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늘은 천둥번개로 번쩍였다. 시멘트 바닥에 고인 물들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을 이루며 흘러 다녔고, 전기 문제인지 간헐적으로 푸른 빛 섬광도 공중에 흩어졌다. 집 앞 커다란 참나무 가지가 광풍에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굵다란 밑동으로 단단하게 서서 사철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늠름한 모습이건만 휘몰아치는 바람 따라 리듬을 타며 휘돌고 있는 굵은 가지가 안쓰러웠다. 저 가지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나무 전체를 흔드는 바람의 위력이 공포스러웠다. 만약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러져 창으로 날아온다면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창에서 떨어져 침대 아래에 숨듯 앉으니, 고양이 이사벨이 옆으로 와 앉았다. 새벽 광풍에 놀랐을 이사벨 머리를 쓸어주었다. 호흡이 붙어있는 생명끼리는 거친 자연 앞에서 한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사랑하는 내 고양이가 아니라 혹 순록이나 주머니쥐와도 동맹을 맺을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이 쓸고 지나는 대로 집이 조금씩 울리며 미세하게 흔들렸다. 질풍 속을 운전할 때 자동차를 감고 흔드는 바람을 느끼듯 집을 감싸고 휘도는 바람이 느껴졌다. 이대로 집이 꺾여 날아갈 수도 있을까 상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전기는 나갔다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끝내 나가버렸다.


  토네이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휴대전화로 날씨를 점검해 보니 우리 동네로 심각한 폭풍우가 지나가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정수기 전원이 나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기는 언제 들어올까. 냉장고의 음식들은 괜찮을까. 차고 문은 어떻게 열어야 하나. 히터가 꺼졌다고 생각하니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사위는 아직 컴컴한데, 집안에서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게 있었다. 휴대전화였다. 집 외벽에 달아놓은 보안 카메라와 연동된 앱에 이웃들의 알림이 수시로 올라왔다. 

  “우리 집 전기가 나갔어요. 다른 곳도 그런가요?” “우리 집 담장이 넘어갔어요. 그리고 뒷마당에 있던 황금색 검은색 개 두 마리가 보이지 않아요. 혹시 발견하시면 제발 알려주세요.” “오늘 학교가 문을 열까요? 아이들을 보내고 일을 가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인근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우리 집도 전기가 나갔어요.” “저런, 빨리 개들을 찾기를 바라요.” “이렇게 잔인할 수가… 이런 날씨에 개들을 마당에 두었다고요!” “우리 동네 학교는 오늘 문을 닫는대요.” 등의 답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등이 무용지물이 된 컴컴한 실내에서 잠옷 차림으로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 이웃들 모습이 그려졌다. 휴대전화 불빛에 떠오른 그들의 얼굴에도 불안이 어려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집에서 웅크리고 있지만, 우리는 연대하고 있었다.


  연이어 올라오는 소식 중 눈에 띄는 사연이 하나 있었다.


  “집 안이 깜깜해요. 

  밖도 역시 깜깜하네요. 

  내다보니 밖은 젖어있는 것 같군요. 

  이렇게 심각한 뇌우를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까요. 

  나만 혼자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좀 말해주세요.”

  

  아이가 쓴 글인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반복하여 읽고 있었다. 자기 집도 전기가 나갔으니 안심하라고 알려주는 따뜻한 답글이 가장 많았다. 지금 읽은 것 중 베스트라고 유쾌히 여기는 사람, 어젯밤 집 나간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읽을수록 시 같기도 한 그 사연에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고물가 속 어려운 경제 상황을 버티는 이웃들이 해마다 찾아오는 달라스의 혹독한 날씨를 또다시 마주하며 해탈한 듯 푸념을 농담처럼 나누는 장면은 어쩐지 내 마음에 몽글몽글한 위로가 되었다.


  날이 밝고 빗줄기가 제법 잦아들어 나가보니 지난밤 내놓았던 쓰레기통 두 개가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웃들의 쓰레기통도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들과 쓰레기들이 비에 젖은 채 흩어져 있었다. 잠옷 위에 비옷을 걸쳐 입은 채 작정하고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니 백 미터쯤 떨어진 곳, 이웃의 차 옆에 넘어져 끼어있던 내 쓰레기통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왕복 육 차선 너머 도로 저편까지 가서 찾아왔다. 눈에 띄는 파란색이 아니었다면 내 쓰레기통인지 알아보지 못할 거리였다. 쓰레기가 아주 적어 가벼웠던 그 쓰레기통은 정말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처럼 우리 단지를 가뿐히 지나 몇백 미터쯤 날아갔던 것이다.


  동은 텄으나 날은 여전히 잔뜩 흐리고 바람이 거세다. 드라마틱한 환경 속에 살지만, 우리 서로 다독이며 이번 어려움도 잘 이겨내기를, 이웃에게 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박운서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트럼프 집행부의 집권초기 행보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
    회계 2025-03-14 
    오전 다섯 시쯤 번쩍이는 섬광과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줄기 때문에 커튼을 젖히고 밖을 살피기도 무서웠다. 커튼을 살짝 들고 빼꼼히 내다본 풍경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작달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늘은 천둥번개로 번쩍였다. 시멘트 바닥에 고…
    문학 2025-03-14 
    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www.Berkeley2Academy.com문의 : b2agateway@gmail.com요즘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전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교육청 (Department of …
    교육 2025-03-14 
    봄의 길목에 서서 바쁜 일상을 탈출하여 무심코 산과 물을 건너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3월과 더불어 시골길을 걷는 것은 탄생하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며 곳곳에 숨어있는 자연의 멋을 몰래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곳곳에 기지개를 펴는 송송이 달려있는 새순 …
    여행 2025-03-14 
    Hmart이주용차장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오늘은 샐러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샐러드하면 떠오르는 대표는 단연 시저샐러드 입니다. 로메인 상추와 크루통(Crouton, 튀긴 빵조각)에 파마산 치즈, 레몬즙, 계란, 마늘, 올리브오일 등으로 만든 드레싱을…
    리빙 2025-03-14 
    큰아이가 가족을 데리고 한국 처가에 다녀오는 동안, 기르던 애완견을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처음 제안이 나왔을 때 나는 선뜻 허락하지 못했다. 개를 키워본 적도 없고, 개와 가까이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애는 메이플을 맡아달라고 간절하게…
    문학 2025-03-07 
    최근 미국 연방정부는 대규모 인력 감축을 진행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연방 공무원 인력 감축과 채용 제한을 명령하였으며 특히 근무기간이 1년 미만인 수습직원들을 대상으로 해고조치를 단행했고 이로 인해 수만명의 연방 공무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연방정…
    회계 2025-03-07 
    유레카 스프링스(Eureka Springs) 여행을 하면서 보는 야산을 끼고 조그맣게 형성된 도시의 아기자기함, 그리고 곳곳에 이곳의 특색을 살려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이벤트들이 있지만, 산을 끼고 내려오는 수정처럼 맑은 이곳의 물을 보노라면 긴 여행의 피로를 말끔…
    여행 2025-03-07 
    엄브렐라 보험흔히 보험을 비 오는 날의 우산으로 비유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속에 우산이야 말로 정말 고마운 존재인 것처럼, 갑자기 당한 사고 보상 책임 앞에 보험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크든지 작든지 문제가 생기면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
    리빙 2025-03-07 
    Hmart이주용차장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오늘은 밥도둑이라는 단어의 원조격인 게장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노르스름한 장이 담긴 게 껍데기에 밥을 비비면 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흔히 밥도둑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게장은 어떤 재료…
    리빙 2025-02-28 
    공학박사박우람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지난 칼럼에서 양자 컴퓨터의 배경 원리가 되는 양자 중첩과 양자 얽힘을 간략히 알아보았다. 원자처럼 매우 미세한…
    리빙 2025-02-28 
    박운서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바다건너 고국에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회계 2025-02-28 
    미주경희사이버대학교동문회 임원방에서 우리도 유명 강사님들을 초청하여 줌강연회를 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동문은 물론이고,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도 들을 수 있도록 오픈 강의로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줌강연은 이미 여러 단체에서 하고 있지만, 동문의 화합과 결…
    문학 2025-02-28 
    재테크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운이 좋아서 돈을 번 것일까, 아니면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과 투자 원칙이 존재하는 것일까? 성공한 투자자들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들은 일반적인 대중 심리를 따르기보다 역발상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움직이며, 이를…
    부동산 2025-02-28 
    핫 스프링스(Hot Springs)의 아침은 다운타운에서 216피트, 해발 1256피트 높이의 산에 위치한 핫 스프링스 마운틴 타워(Hot Springs Mountain Tower)에 비친 강렬한 태양빛 쇼와 같이 시작이 됩니다. 한적한 도시이지만 다운타운의 중심이라 …
    여행 2025-02-28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