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백경혜] 폭풍 속에서 농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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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다섯 시쯤 번쩍이는 섬광과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줄기 때문에 커튼을 젖히고 밖을 살피기도 무서웠다. 커튼을 살짝 들고 빼꼼히 내다본 풍경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작달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늘은 천둥번개로 번쩍였다. 시멘트 바닥에 고인 물들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을 이루며 흘러 다녔고, 전기 문제인지 간헐적으로 푸른 빛 섬광도 공중에 흩어졌다. 집 앞 커다란 참나무 가지가 광풍에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굵다란 밑동으로 단단하게 서서 사철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늠름한 모습이건만 휘몰아치는 바람 따라 리듬을 타며 휘돌고 있는 굵은 가지가 안쓰러웠다. 저 가지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나무 전체를 흔드는 바람의 위력이 공포스러웠다. 만약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러져 창으로 날아온다면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창에서 떨어져 침대 아래에 숨듯 앉으니, 고양이 이사벨이 옆으로 와 앉았다. 새벽 광풍에 놀랐을 이사벨 머리를 쓸어주었다. 호흡이 붙어있는 생명끼리는 거친 자연 앞에서 한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사랑하는 내 고양이가 아니라 혹 순록이나 주머니쥐와도 동맹을 맺을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이 쓸고 지나는 대로 집이 조금씩 울리며 미세하게 흔들렸다. 질풍 속을 운전할 때 자동차를 감고 흔드는 바람을 느끼듯 집을 감싸고 휘도는 바람이 느껴졌다. 이대로 집이 꺾여 날아갈 수도 있을까 상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전기는 나갔다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끝내 나가버렸다.
토네이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휴대전화로 날씨를 점검해 보니 우리 동네로 심각한 폭풍우가 지나가고 있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정수기 전원이 나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기는 언제 들어올까. 냉장고의 음식들은 괜찮을까. 차고 문은 어떻게 열어야 하나. 히터가 꺼졌다고 생각하니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사위는 아직 컴컴한데, 집안에서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게 있었다. 휴대전화였다. 집 외벽에 달아놓은 보안 카메라와 연동된 앱에 이웃들의 알림이 수시로 올라왔다.
“우리 집 전기가 나갔어요. 다른 곳도 그런가요?” “우리 집 담장이 넘어갔어요. 그리고 뒷마당에 있던 황금색 검은색 개 두 마리가 보이지 않아요. 혹시 발견하시면 제발 알려주세요.” “오늘 학교가 문을 열까요? 아이들을 보내고 일을 가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인근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우리 집도 전기가 나갔어요.” “저런, 빨리 개들을 찾기를 바라요.” “이렇게 잔인할 수가… 이런 날씨에 개들을 마당에 두었다고요!” “우리 동네 학교는 오늘 문을 닫는대요.” 등의 답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등이 무용지물이 된 컴컴한 실내에서 잠옷 차림으로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 이웃들 모습이 그려졌다. 휴대전화 불빛에 떠오른 그들의 얼굴에도 불안이 어려있었을 것이다. 각자의 집에서 웅크리고 있지만, 우리는 연대하고 있었다.
연이어 올라오는 소식 중 눈에 띄는 사연이 하나 있었다.
“집 안이 깜깜해요.
밖도 역시 깜깜하네요.
내다보니 밖은 젖어있는 것 같군요.
이렇게 심각한 뇌우를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까요.
나만 혼자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좀 말해주세요.”
아이가 쓴 글인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반복하여 읽고 있었다. 자기 집도 전기가 나갔으니 안심하라고 알려주는 따뜻한 답글이 가장 많았다. 지금 읽은 것 중 베스트라고 유쾌히 여기는 사람, 어젯밤 집 나간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는 오즈의 마법사처럼 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읽을수록 시 같기도 한 그 사연에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고물가 속 어려운 경제 상황을 버티는 이웃들이 해마다 찾아오는 달라스의 혹독한 날씨를 또다시 마주하며 해탈한 듯 푸념을 농담처럼 나누는 장면은 어쩐지 내 마음에 몽글몽글한 위로가 되었다.
날이 밝고 빗줄기가 제법 잦아들어 나가보니 지난밤 내놓았던 쓰레기통 두 개가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웃들의 쓰레기통도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들과 쓰레기들이 비에 젖은 채 흩어져 있었다. 잠옷 위에 비옷을 걸쳐 입은 채 작정하고 쓰레기통을 찾아다니니 백 미터쯤 떨어진 곳, 이웃의 차 옆에 넘어져 끼어있던 내 쓰레기통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왕복 육 차선 너머 도로 저편까지 가서 찾아왔다. 눈에 띄는 파란색이 아니었다면 내 쓰레기통인지 알아보지 못할 거리였다. 쓰레기가 아주 적어 가벼웠던 그 쓰레기통은 정말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처럼 우리 단지를 가뿐히 지나 몇백 미터쯤 날아갔던 것이다.
동은 텄으나 날은 여전히 잔뜩 흐리고 바람이 거세다. 드라마틱한 환경 속에 살지만, 우리 서로 다독이며 이번 어려움도 잘 이겨내기를, 이웃에게 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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