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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19-08-3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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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릴레이 ] 한인 작가 꽁트 릴레이 40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우가 고개를 들고 보니 ‘인문학강좌’라는 팻말이 걸린 출입문이 바로 보였다. 낭만클럽을 찾느라 애쓸 필요도 없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입구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상큼 웃으며 고개를 까딱 했다. 아하, 회비징수원이로군. 준우는 얼른 알아차리고 웃는 여자 앞으로 다가가 지갑을 꺼내들었다. 얼마요, 입은 열지 않고 눈으로 물었다. 여자는 얼씨구, 하는 표정을 짓다가 얼른 감추며 테이블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회비 $10- 친절하게도 이미 테이블 위에 그런 쪽지가 붙어 있었건만 여자의 웃음에 팔려 미처 그것을 못 봤던 거다. 준우는 서둘러 지갑을 꺼내 뒤적이다가 급 당황했다. 지갑 속에는 달랑 10달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던 거다. 준우는 지갑속의 마지막 지폐 한 장을 꺼내들며 자신도 모르게 어이쿠, 다행이다,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걸 여자가 들었나 보다.
“어머, 돈이 그것밖에 없나보지요? 그럼 안 내셔도 되요, 뉴커머니까 탕감해드릴게요,”
여자는 강의 자료가 실린 프린트 물을 건네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받으세요,” 생각지 않은 여자의 호의에 당황한 준우는 지폐를 테이블위에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남자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되나요, 차에 게스를 넣든지, 커피라도 마시려면......”
“강의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갈 건데요 뭐. 게스는 크레딧 카드도 있고, 암튼 괜찮으니까 받으세요, 받으시라고요.”
첨보는 여자에게 밑천을 내보인 무안함에 준우는 서둘러 등을 보이고 자리를 찾았다.
‘청춘, 사랑, 객기’를 주제로 내건 강의는 시작도 되기 전에 김이 샜다. 낭만클럽회장이라는 초로가 마이크를 잡고 서더니 내빈소개를 한답시고 장황하게 제 자랑을 늘어놓았던 때문이다. 겨우 삼십 여명 남짓한 참석자의 대부분이 회장의 학연, 지연, 교敎연 따위로 엮인 듯 보였는데 인물소개가 가관이었다.
“에, 저 뒤쪽에 앉은 황 교수님은 저 보다 2년 선배신데요, 물리학을 전공하시고 유학을 오셨는데 나사에 근무하시다가 리타이어 하셨고요, 왼편 앞줄의 저 머리 하얗게 쇤 친구는 꽤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저와 서울대 육십 구 학번 동기예요. 다음 주 이 시간에 노자사상에 대해 말씀을 해주실 저희 낭만클럽의 주강사십니다. 그리고 요쪽에 항상 노트를 하시는 젠틀맨은 바로 이 장소를 무상으로 대여해주시는 저희교회 시무장로이시며 낭만클럽의 최대 후원자이신 박 회장님이십니다. 자, 박수 한 번 주시지요!”
회장의 제안에 참석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을 짝짝 쳤지만 준우는 입맛을 짭, 다셨다.
-이런 젠장, 낭만클럽이라더니 여기도 서보이 놀이터로군, 오나가나 저놈의 서울대 때문에 못살아,- 준우는 당장에 배알이 꼴리고 말았다. 언젠가 그 만큼이나 S대 출신을 미워하던 친구 K가 ‘한국은 서울대와 현대자동차가 없어져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준우가 ‘서울대는 그렇다 치고 현대자동차는 왜?’ 했더니 ‘현대자동차노조가 한국노동계의 괴물이야, 전국의 노조란 노조는 모두 현대차노조가 컨트롤 한다고, 현대자동차가 없어져야 그 노조괴물이 사라질 거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했다. 머리를 탁 치는 소리였다. ‘서울대 아이들’ 이란 말을 ‘서boy’로 명명한 것도 그 친구였다.
-아무튼 현대차노조는 바다 저쪽의 문제지만 S대는 여기까지 따라다니며 속을 썩이니 저것부터 퇴치하는 게 급선무야.- 준우는 짜증을 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의 바램은 가능성 1퍼센트도 없는 무망한 일이었다. 준우가 그렇게 죽상을 짓던 말든 아랑곳없이 본 강의는 시작되었는데, 강사는 역시 S대출신의 불문학자였다.
“서울대 담장을 끼고 개천이 흘렀어요, 교문을 나서면 그 개천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지요. 우리 불문과 동기들은 그 다리를 미라보다리라고 불렀어요, 구정물 흐르는 개천은 세느강이라 했고요, 어느 하루 동기들 서넛이 학교 앞 주점에서 술판을 벌렸는데 모두 거나해졌습니다. 친구 하나가 우리 미라보다리 아래 내려가 세느강에 발 담그고 시를 낭송하자는 기발한 제안을 했어요. 술 취한 친구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당장에 개천으로 달려가 우르르 다리 아래로 내려갔지요, 그 때가 늦가을이었는데 한 밤중엔 제법 추웠습니다, 허지만 모두 아랑곳하지 않고 구두와 양말을 벗어던지고 구정물에 들어섰습니다. 객기였지요, 술과 젊음이 빚어낸 광기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합창하듯 미라보다리 라는 시를 한 목소리로 낭송했어요. 술르뽕 미라보 꿀드 라 센느 에 노자물.... 포 띨 낄 망 수비엔.... 라조아 브네 뚜주르..... 아쁘레 라 비엔느.........”
강사의 불어원문 시낭송이 끝나자 이번에도 왁자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준우는 그쯤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불어 시낭송을 듣고 있자니 목덜미가 스멀거리고 가슴이 오글거려 서였는데 마침 오줌도 급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준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데 웃는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인 듯 보였다.
“가시려고요?” 여자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 네, 집이 멀어서요. 아까는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돈 도로 집어넣을 걸 그랬어요, 하하하.” 준우는 우정 농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 보세요, 후회하시잖아요, 여자 말 들어서 손해 될 게 없다니까요. 어때요? 다음 주 강의에 오시는 거?” 여자는 그 말만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아주 잠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민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라고요. 회비 탕감 플러스, 프리 커피, 어때요?”
“오, 그런 딜이라면....오십 일퍼센트 가능합니다.” 여자의 제안에 준우의 마음은 급작스레 무장해제 되어서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무언가 손톱만한 낭만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때문이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주에 뵈어요, 굿나잇!” 여자는 처음처럼 상큼하게 웃으며 돌아서 갔다.
설마 회장 딸은 아니겠지, 멀어져가는 여자를 보며 준우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준우는 망상을 버리고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갔다.

이용우 (소설가. LA거주 작가)

1951년 충북 제천 출생.
미주 한국일보 소설 입상
미주 한국문인협회 이사
미주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자영업 / 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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