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안동역’과 텍사스 정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1-03-12 09:44

본문

오랜만에 내린 눈다운 눈을 보며,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읊조리고, 진성의 <안동역>을 흥얼거릴 때 까지만 해도 좋았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했던 사람이 눈이 무릎까지 찼는데도 안 온다는 안동역 가사는 뭔지 모르게 김소월의 <진달래>처럼 애잔한 기다림의 미학까지 느껴져 웬만한 시 보다 낫다는 소리를 해가며, 남편과 함께 김치찌개와 소주로 저녁을 먹을 때 까지만 해도 눈오는 날의 정취가 물씬 났다. 

눈이 귀한 텍사스에서 강산이 몇 번 변할 동안 살면서, 진눈깨비만 내려도 와! 눈이다 하고 흥분하던 예전 아들들처럼 나 역시 눈만 오면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전송하고, 간만에 용도가 확실하게 생긴 어그부츠를 신고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밥을 걱정하고, 화분을 거라지 안으로 옮기는 등, 수선을 있는 대로 떨때만 해도 우리가 전 세계 뉴스거리가 된 텍사스 한파의 불행한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텍사스에 겨울 낭만이 없는 것은 순전히 눈이 오지 않는 탓이라 여기며, 이번기회에 그동안 밀린 눈을 실컷 구경하며 팬데믹으로 겨울여행조차 가지 못한 것을 집안에서 야무지게 보내리라 했던 작심은, 몇 시간 뒤 하염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날 새벽, 목이 말라 눈을 떴을 때 집안에 불빛이 없다는 걸 느꼈다. 잠들기 전에 거실의 스탠드는 항상 켜놓았는데, 그 불도 꺼져있어 잠깐 남편이 전기세 절약한다고 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냉장고 빨간 숫자를 비롯한 전기와 연결된 집안의 모든 숫자들이 다 꺼져있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멀리 언덕 위 동네도 불빛 한 점이 없었다. 

그래도 정전 첫날 아침까지는 히터의 온기가 남아있어서 견딜만 했다. 부르스타로 물을 끓여 캠핑용 커피주전자에 커피를 끓여 마시며, 요즘 유행하는 차박 왔다 셈치자하고 농담까지 해가며, 곧 전기가 돌아오겠지 하고 유유자적 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한파가 아닌 겨울 추위였다. 

그런데 전기는 그날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낮 동안 냉골이었던 집안공기가 본격적으로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집안에 있는 초란 초를 다 꺼내놓고 불을 붙였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사놓은 랜턴이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 가느다란 양초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안방에만 대 여섯 개를 켜놓았더니, 새벽이 되니 매캐한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특히 오래된 양초는 타들어갈수록 냄새가 심해 다 불을 꺼버렸다. 

 

정전 이틀째가 되자 어쩌면 정전이 장기전으로 갈지 모르겠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집 앞 길은 이미 빙판이 되어 운전을 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식량은 한 달은 파먹을 만큼 있었다. 

멀리 플레이노에 사는 친구부부가 오라고 했지만 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오스틴에 사는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역시 그곳도 정전 도시로 변해서, 이웃들과 집 앞에서 불 피울 나무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수도자처럼 딱 필요한 물건만 갖추고 사는 녀석인지라 이불도 한 채 뿐인데, 밤이면 어떻게 잘까 싶은 것이, 우리가 추운 것 보다 더 맘이 쓰였다. 최대한 옷을 두껍게 입고 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나마나한 소리만 했다.

 

자다가도 너무 추우니 깊은 잠이 안 들었다. 그럴 때마다 간첩처럼 이불 안에서 휴대폰을 켜고 유튜브로 최근 DFW 지역뉴스를 검색해보았는데 여자 앵커가 언제 블랙아웃이 끝날 거냐고 앙칼지게 물어도 주지사나 텍사스 전력위원회 회장은 버벅거리기만 할 뿐 확실한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수백명의 정전 피해자들의 댓글이 그나마 내 마음 같아 위안이 되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은 핑계될 구실만 찾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이 안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하다. 

게다가 수도관까지 동파되어 울부짖는 흑인 할머니 영상을 보니, 영하 18도의 한파가 정말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재난이란 사실이 절감되었다.

 

사람이 너무 편하게 살면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로만 향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한파를 겪으면서 혹독하게 겪은 것은 추위 뿐만이 아니다. 걱정을 해주는 이웃도 많은 반면, 이웃의 정전을 강 건너 불 보듯이 보는 무심한 이웃들도 더러 보았다. 

가장 어이 없었던 것은 ‘봄이 왔네’ 하는 무 개념한 글이나 동영상을 보내는 단톡을 보았을 때이다. 

추위에 마음이 오그라든 탓인지, 아니 저 사람들은 텍사스 한파에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도 못 보았나 싶기도 했고, 정전을 못 겪었다 할지라도 정전에 처한 이웃들의 추위가 1도 공감 되지 않는 저 비현실적인 공감력의 정체는 무엇일까가 심히 궁금해지기도 했다. 

허긴 정말 공평하게 모든 텍산들이, 아님 전 미주가 정전시간을 공유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4일간의 정전이 끝난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화창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안동역을 다시 흥얼거리자, 남편 왈, 그 노래 들으면 지나간 ‘정전의 외상’이 떠오른다며 웃는다.

수상한 바람 한 점이 허리케인을 몰고 오듯이 이제 우리집에서 안동역은 정전을 예측하는 금지곡이 되어 버렸다. 당분간은 ‘한파 트라우마’ 때문에 눈이 내린다고 무조건 좋아하게 될 것 같지가 않다.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동심을 앗아가 버린 얄미운 한파가 다시 재발 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후이변의 원인엔 나도 한 몫 했다는 자각을, 플라스틱 컵 하나라도 덜 쓰며 실천해야 하겠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만족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최고가 아니라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 최고는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최선은 나에게 좋은 것이다.가장 좋은 것만 찾는 인생은 만족이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늘 바뀌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스마트폰은 한 달 주기로 바뀐다. 신제품이 계속 …
    부동산 2021-03-19 
    자동차 보험료가 운전규정 위반 티켓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이미 상식수준이 되었다. 규정위반 티켓을 받으면 벌금을 내야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3-5년간 티켓 받은 기록으로 인해 보다 많은 보험료를 지불해야 한다. 사실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규정위반 티켓은 운전…
    리빙 2021-03-12 
    지금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있다. 눈만 뜨면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나와 한 치 앞을 못 내려다볼 지경이다.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발의된 1.9Trillion 달러짜리 부양안의 시행이 눈앞으로 다가왔다.일인당 1,400달러씩 준다는 3차 Stimul…
    회계 2021-03-12 
    오랜만에 내린 눈다운 눈을 보며, 문정희의 &lt;한계령을 위한 연가&gt;를 읊조리고, 진성의 &lt;안동역&gt;을 흥얼거릴 때 까지만 해도 좋았다.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했던 사람이 눈이 무릎까지 찼는데도 안 …
    문학 2021-03-12 
    목이 너무 말라 갈증이 날 때 어떻게 하시나요? 시원한 탄산음료 하나를 딱! 따서 벌컥벌컥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고,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캔 음료를 마시면서 잠재적 발암물질인 퓨란도 함께 마시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또한 아이…
    문학 2021-03-12 
    시장금리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모기지 이자율도 급등하고 있다. 30년 고정 모기지 이자율은 작년 9월 이후 처음으로 3%대로 재진입했는데, 상승속도가 상당히 빠르다.이번주 역시 자산시장의 국채금리가 크게 급등하며 주식시장 또한 흔들리고 있는데, 이 영향으로 모기지 이자율…
    부동산 2021-03-12 
    「엄마, 사랑해요」1941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난 헬렌 레디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가수가 되었다.그리고 1966년, 헬렌은 호주에서의 모든 가수활동을 포기하고 3살 된 딸트레이시를 데리고 뉴욕으로 온다.하지만 그 당시 미국의 음악시장은 남성밴…
    문학 2021-03-12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우리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스며들고 있다. 그 중에서 인공지능과 자동차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된 것 같다. 자동차가 이제 단순한 운송수단에서 벗어나 양방향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가 가능한 …
    회계 2021-03-05 
    예전에는 어깨통증이 40-50대에 주로 나타났지만, 요즘은 다양한 연령대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사용시간이 늘어나면서 바르지 않은 자세로 목과 등에 부담이 증가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어깨통증은 어깨관절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
    리빙 2021-03-05 
    상필에게 있어서 버락 오바마는 흑인계로 미국의 45대 대통령이었다는 것 밖에 아는 게 없었다.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질 이유나 계기가 없었다고나 할까.“상필에게 오바마 스피치 비디오 보여주자.”로버트 씨의 말에 레이가 비디오를 틀었다. 패기와 열정이 넘쳐나는 젊은 오바마…
    문학 2021-03-05 
    우리는 현재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 속에서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이 넘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이렇게 불확실성이 가득한 부동산 재테크의 환경 속에서 현금성 자산 모두를 은행에 저금만 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노후자금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마냥 소…
    부동산 2021-03-05 
    코로나 19 사태와 더불어 지속되는 낮은 이자율은 많은 사람들에게 집을 사거나 재 융자, 심지어 좀 더 큰 새 집으로 이사하도록 자극제 역할을 해왔다.이러한 상황은 우리 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막상 집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특별히 처음 집을…
    리빙 2021-02-26 
    요즘처럼 우리가 사는 텍사스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작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Covid 19 확진자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텍사스의 가장 많은 Covid 19 확진자 기록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끌더니 음력으로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90년만…
    회계 2021-02-26 
    “이월이 짧은 이유를 아니? 날씨가 늘 요변덕 떠는 이월이 난 싫어.” 백인 할머니 불평이다.“그래서 더 감사할 것이 많은 2월, 봄맞이를 위한 고통의 시간은 성장의 축복이니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월에게 살며시 마음을 전한다.어제 아침엔 유리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문학 2021-02-26 
    아침식사를 거르기보다 챙겨 먹는 것이 더 건강에 좋은 것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 입니다. 특별히 식단을 조절하는 성인 이외에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침은 특별히 더욱 중요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해 오히려 만성질환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
    문학 2021-02-2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