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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peek through the window)]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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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권여선의 ‘봄밤’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기 전에 가끔 듣는 오디오북에서 들은 이 소설은 너무나 슬퍼서 그날 밤 난 잠이 안 왔다.
주인공인 영경과 수환은 부부다. 재혼한 각자의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이들은 피로연 술자리후 수환이 억병으로 취한 영경을 업고 집에 데려다 준 뒤부터 12년을 부부로 살게 된다.
수환은 부도를 맞고 위장 이혼한 아내에게 모든 걸 빼앗긴 뒤 신용불량자가 된 뒤, 임시직을 전전하며, 언제나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고 있었다.
국어교사인 영경은 결혼한 뒤 1년 반 만에 이혼을 하고 전 남편과 시부모가 아이를 빼돌리고, 이민을 가 버린 이후 그녀는 술을 입에 대고 알콜 의존증이 깊어가면서 20년간 재직했던 교직을 떠나게 된다.
한 마디로 이 둘은 회복불능의 지경으로 인생의 불운을 모두 지닌 존재들이다. 결국 수환은 중증 류마티즘에 걸려 척추가 무너져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영경은 심한 알콜 중독과 간경화, 그리고 심각한 영양실조로 같은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오래 전 봄밤, 부부가 된 이들은 이제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봄밤을 향하여, 서로를 놓아준다. 만물이 새롭게 시작되는 봄날, 이들의 이별이 이토록 서러운 건, 죽음의 봄밤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가 더 없이 서글프기 때문이다.
여기 해마다 죽음의 골고다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내가 또 있다. 그때도 아마 봄날이었을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에 나타날 때 만 해도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그를 거리가 떠나가도록 환영했다.
그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이었으며,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군의 왕이었다. 하지만 짝사랑의 끝은 비극인 것처럼 만군의 왕은 왕을 사칭한 죄로 십자가형 선고를 받고, 그를 환대하던 군중은 갑자기 돌변하여, 도둑 바라바를 대신 살려주라고 외친다.
그 군중들 속에 내가, 우리가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그의 수난에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똑 같은 잘못을 지겹도록 짓고, 돌아서면 그를 배신하는 유다, 베드로 같은 우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봄밤 그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다시 왔다. 모진 십자가형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모와 멸시를 받고, 가시관을 쓴채... 비록 죽어라 말도 안 듣는 그의 백성들이지만, 부활의 봄밤을 안겨주려고 그가 다시 왔다.
시인 김수영 역시 봄밤에 느낀 소회를 시로 남겼다. 술에서 깨어나, 급변하는 세상에서 제발 우리라도 서둘지 말고 살자고 애원한다. 혁혁한 업적을 세우지 못해도, 피곤하여도, 기적소리가 슬퍼도, 재앙과 불행이 닥쳐도 서둘지 말자고 한다.
행여 남에게 뒤쳐질까, 손해보고 살까, 부자가 되지 못할까에 연연하지 말고, 땅속 벌레처럼 아둔하고 가난하게 살자고 한다. 이런 시인의 자각처럼, 봄밤은 왠지 모르게 잊고 살았던 실존의 시간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하얀 배꽃이 마당에 쌓이고, 기차소리가 유난히 가까이 들리는 밤, 세월이 가는 소리를 듣고, 내면의 울림에 귀를 기우리게 된다. 삶과 죽음의 도그마를 떠올리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못 올 봄날을 벌써부터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서글픈 봄밤과 부활의 봄밤, 시인의 봄밤이 한데 어우러지는 백합꽃 향기 그득한 봄밤, 시인의 시를 다시 한번 펼쳐본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 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 이여
- 김수영 <봄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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