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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 시시하지 않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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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2-03-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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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시리다. 오후가 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인가 보다. 내일도 하느님이 주시는 특별휴가가 될 것이라는 예보는 맞을 것 같다. 

모처럼 기쁘게 그리고 부지런히 내일 할 일까지 마무리하느라 밖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소리 없이 내린 이슬비가 고스란히 얼었나보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게 문 닫고 들어오라는 아이의 성화에 이어 남편의 성화가 보태졌다.

 

차 유리를 전부 녹여 시야를 확실하게 확보한 다음 운전하라는 당부까지 듣느라 통화는 길게 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마 작년 한파였던 것 같다. 

 

집이 가까우니 대충 고양이 세수하듯 앞 유리 반 정도만 녹이고 출발했다가 운전하면서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제대로 정리하고 갈 생각이었다. 

 

어느새 주차장은 반질반질하게 얼어 있었고 차 밑으로 자잘한 고드름이 군데군데 열려있었다. 이틀 전만 해도 에어컨을 틀고 일했는데 고드름까지 열리다니 정말 화려한 변신이었다. 

 

작년에는 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정전에 단수까지 이어지며 85년 만에 가장 추운 밸런타인데이가 되었었고 한 세대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기록적인 한파였다는 통계가 나왔다. 

 

텍사스 기상 기록을 갈아엎은 어마무시했던 작년의 한파와는 다르게 이번 한파는 온순할 것 같다. 하얀 눈 속에 갇혀 조용하게 한 이틀 보낸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달라스에 눈이 올 거라는 예보가 뜨면 사람들은 반가운 손님맞이라도 하듯 분주해진다. 

 

올해는 더더욱 작년 한파를 떠올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부터 옆 마트도 벽난로에 땔 장작을 비롯해 생필품들이 동이 날 정도로 들썩거리다 조용해졌다.

 

 얼음의 두께가 만만치 않아 뜨거운 물이라도 한 번 끼얹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생각했던 만큼 정리되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물을 더 데울 상황은 아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러기로 했다. 

 

도로는 아직 얼지 않아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지만, 집에 가는 길이 왠지 멀고 낯설어 꼭 낯선 곳에 온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낯선 땅에 들어선 여행자다.

 

아침, 눈이 내린 아침. 아니 막 시작된 오후다. 가물가물한 어젯밤 꿈을 더듬거리다 그만두었다. 이제부터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조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작년 내내 동네를 시끄럽게 달궜던 사건. 앞마당 건너 테니스 코트를 파내고 클럽 하우스를 들어내느라 자명종처럼 아침을 깨우던 포크레인이 섰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오래된 그늘이 뽑힌 자리에도 눈이 왔을까 궁금해서 벌떡 일어나 블라인드를 올렸다. 저 자리에 어떤 사람들이 집을 짓고 가정을 꾸릴까. 

 

혼자서 블루프린트를 펼쳐놓고 기둥을 세우고 벽돌을 쌓고 색칠하다가 문득 코로나 19가 터지기 전, 견적 뽑았던 그때 집 페인트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후회와 자책이란 놈들은 꼭 한 편을 먹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서성대다가는 잡힐 것 같아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토끼 발자국들을 따라 마당 가로 도망쳤다. 

 

그런데 작년에 대문 앞까지 찾아왔던 거북이가 갑자기 길을 막는다. 중간 크기의 냄비만 한 영물이 그땐 왜 그리 무서웠던지. 겁에 질린 내 비명에 오히려 놀라 뛰어나왔던 아이들의 그 웃던 얼굴이 왜 지금 이 시각에 이마를 비비며 다가오는지. 

 

멋쩍어 뒷걸음질 친다. 모두 겨울잠이라도 자는 듯 기척도 없는데 더 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웠다. 

 

왜 이런 날은 자동으로 리와인드 된 쪽 대본 영상이 기억을 뚫고 올라오는지 모르겠다. 나의 흑역사 전집이라도 되는 듯 민망하고 쪽팔리는 장면만 편집되어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되는 것이다. 

 

마치 몰래카메라에 노출된 양 당황해서 황급히 이불 속으로 숨는다. 밀쳐놓았던 베개를 끌어다 코를 박고 정체 모를 설움에 콧물을 찍어낸다. 

 

저절로 터진 울음에 목이 메 엄마를 불러보는 것이다. 이런 날 나처럼 조용히 “엄마!” 하고 나를 불러 줄 사람은 있을까 생각하다가 서러워지는 것은 또 왜일까. 식구들 다 잠든 사이 이불 쓰고 앉아 소주병 뚜껑을 따 홀짝이던 생각이 나서일까. 

 

잠이 안 와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우울을 불러 마주하고 앉아 나 대신 우울을 달랬던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다. 

 

눈이 왔다. 오겠다고 온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전해온 소식대로 눈은 왔다. 꼭 다녀가겠다는 소식에 설렜던 보람은 있다. 낯선 나라의 여행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희열로 며칠쯤은 탕진하는 것도 괜찮다는 빤한 결론과 함께 다시 제자리로 소환될 것이다. 

 

달의 공전, 지구의 공전처럼 나의 외로운 공전은 또다시 시작되리라는 것 또한 고스란히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괜찮다. 다 괜찮다. 말도 안 했는데 마음을 들키고 파헤쳐지는 아침이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시시한 답을 위한 서문 / 김미희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일상의 질서가 뒤집히거나

기쁨이 퇴색되고 만 회색 바탕에 빠지는 허탈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말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상을 서둘러 물리고 난 겨울 해가

어둠에 순번을 넘기고 떠나면

밤이 깊어질수록

불혹의 혹사는 삶의 대세를 잡고 진저리 치게 된다

 

반역을 꾀하기 시작하는 흔들림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오랜 관습의 유지를 피하기 위해

온갖 생각들로 빼곡히 밤을 채워보지만

고요는 열외의 서열에도 끼지 못해

나는 아직 없는 존재를 앓고 있다

 

하여

사랑하는 것이 배경이던 여백을 찾아

아득히 먼 시발점을 향해 거슬러 나서는데

그것은 결국

머릿속이 탈탈 털리고 만 구멍일 뿐

답은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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