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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나를 위로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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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2-07-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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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약에 취해 한 번도 깨지 않고 잤습니다. 여덟 시간은 족히 잔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취한 숙면이었습니다.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투명한 아침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제 아침에는 없었던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는 혹독하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기침으로 지쳐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이 조금은 치유된 거 같아 오늘은 기어코 일어나 움직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병이 잘 낫지 않습니다. 소화불량이나 작은 상처도 쉽게 다스려지지 않고 오래갑니다. 혼자 견디고 이겨내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눈물이 자주 흐르고 서러워집니다. 눈물이 자주 흐른다는 것은 늙고 있다는 것과 분명 관계가 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움직여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겠지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도 일어나지 못할 거 같아 일단 일어나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약 기운이 남은 탓인지 멀미가 났습니다. 그래도 기침은 많이 줄어든 거 같아 다행입니다. 한 이틀만 더 견디면 될 거 같습니다. 토요일에 사다 놓은 김치걸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우선 하얀 밥에 바로 무친 겉절이를 얹어서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마른 입안에 침이 돌고 기운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먹고 기운을 내자. 밥이 보약이라지 않는가. 내 의지로 나를 이끌고 나가야지. 아직 세상과의 관계가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큰 양은 다라를 꺼내 배추를 갈라 소금물에 절여놓고 씻으러 갑니다. 거울을 보니 석 달 열흘은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내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두 주 전부터 위염이 도져 약으로 간신히 달래고 있었는데 감기까지 걸려들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만 주워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떨어졌나 싶었던 기침이 가슴을 울리고 등을 치며 다시 올라옵니다. 질기기는 하지만 기침 따위에 내가 질 수는 없습니다. 샤워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단 지친 내 몸과 마음에 물을 흠뻑 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덕지덕지 붙어있는 감기라는 놈을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어내야겠습니다.

 

모처럼 커피잔을 들고 뒤뜰로 나갔습니다. 흙먼지가 뽀얗게 앉은 유리 테이블이 눈에 거슬려 물호수를 끌어와 물을 뿌렸습니다. 깨끗해진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앉으니 마음도 청안해집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나비 한 마리가 파꽃 위에 앉아 있다가 백일홍 꽃잎에 옮겨 앉았습니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 담장을 넘어온 능소화도 가지 끝마다 꽃을 매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 년 내내 안에서만 사는 나에게 맑은 바람을 만나는 시간은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시간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 날은 가슴 뿌듯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잘 마무리 한 날도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밀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는 날 또한 만족한 웃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늘어져 쉬는 날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날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로하는 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누가 아닌 나를 위한 날. 나를 위해 좋은 음악도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 줍니다. 맛있는 것도 먹게 해주고 바람 냄새도 맞게 해줍니다. 그동안 고생하고 수고한 나에게 보답하는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바빴던 눈을 붙들어 초록 물을 들이고 가슴에는 물소리 바람 소리로 채우는 것입니다. 설령 바람이 재주를 부려 머리칼을 한껏 헝클어 놓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잠깐 쪽잠을 자는 것이지요. 혹여 개꿈이라도 꾸게 되면 툭툭 털고 일어나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하루를 헐렁하게 보내다 보면 배추는 잘 절여지고 집안에는 밥 냄새가 진동하겠지요.

 

별 특별한 것 없는 하루에 특별하지 않은 냄새와 소리를 채워준다면 아마 며칠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히 특별한 날이 되고도 남는 게 아닐까요. 굳세게 움켜쥐고 있던 아집도 소금물에 절인 배추처럼 슬그머니 풀어지지 않을까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내가 잘 어우러져 맛있는 겉절이가 되겠지요.

 

 

어떤 배역 7 / 김미희 

 

엄마를 죽여야 합니다

죽을 수 없다고 소리칠 리 없는 엄마를

태곳적부터 엄마여서 지금도 엄마여서

나로 살지 못해 아직껏 엄마인 그 엄마를

마지막 대사도 뱉지 못하고 우물거리다 암전 속에 갇혀

스스로 감옥이 되어있는 엄마를 죽여야 합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는데 그 말이 찌릅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욱신거리는 그 아픈 속내가 보일까 봐

덤덤히 밥공기를 비우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울렁울렁 입을 헹구는  엄마는

죽어야 합니다

 

1막이 내린 암전 속 무대에서 아직 더듬거리는 소리로

괜찮다고 괜찮다고만 우물거리는 엄마

받아 쥔 종이 카네이션 꽃잎 하나도 어찌 그리 소중한 엄마야

왜 나마저 그래야 해

그 엄마를 맡아내는 기억때문에 그 냄새 지울 수 없어

목숨 건 세월이 한꺼번에 시드는 게 싫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엄마는 엄마인 것이라고

잘 못 해도 잘해도 엄마는 엄마라는 내 안의 엄마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리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처럼 잔인한 일 없다고

발설하지 못하는 엄마는 정말

죽어지내는 엄마처럼 죽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 사이의 무수한 창문들이 열린 채

낯익은 감정들이 모눈종이의 빈칸을 채워 내

낡아빠진 기왓장이 금방 쏟아지며 무너질 집을 지켜야 한다는 엄마를

2막이 오르기 전에 어찌 무대에서 들어내야 할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엄마의 손사래를 더는 볼 수 없어

죽어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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