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맺음달 언저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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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컴퓨터가 아프다.
환자로 치면 혼수상태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글 쓰는 작가에게 컴퓨터는 신체의 일부 같아서 문제가 생기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명작을 쓰는 건 아니지만 손을 뻗으면 필요한 책이 있는 책장, 키 높이에 맞는 책상과 의자, 무엇보다도 창 두 개를 띄우고 작업할 27인치 모니터가 딸린 데스크 톱이 있는 내 공간이어야 졸작이나마 써진다. 익숙한 것들이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정지용 해외문학상 시상식이 있어서 엘에이에 갔다. 가기 전에 그 동네와 우리 동네 일기 예보를 확인했다. 날씨를 알아야 옷 가방을 싸는 데 도움이 되어서였다. 양쪽 다 비 소식이 있었다. 벼락 치던 날 컴퓨터 하드를 날려 먹은 쓰라린 기억이 있어서 컴퓨터 전원을 끄고 갔다. 호텔에서 틈틈이 일하려고 일감을 챙겼는데 하지 못했다. 한 공간에 익숙해진다는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요즘은 몸도 낯을 가린다. 집에선 머리만 땅에 닿으면 일 분도 안 되어 잠이 드는데, 잠자리가 바뀌면 아무리 피곤해도 설 잠을 잔다. 화장실 문제도 해결을 못해 뱃속에 가스가 차서 나중엔 맛있는 거 많은 도시에서 먹는 게 반갑지 않다.
집에 돌아와 밀린 일을 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경고문구가 뜨더니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껐다가 다시 켜 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컴퓨터는 내 비서이고 정보은행이고 일등 공신이어서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큰일이었다. 속도가 느려지는 전조가 있었다. 중간에 몇 번 손보긴 했지만, 칠팔 년 썼으니 꽤 오래 버텨준 효자였다. 기계는 믿을 게 못 돼서 자료 백업을 열심히 하는 편인데 최근에 일이 많아지면서 제때 하지 못했다. 꼭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 보험 다른 회사로 바꾸면서 잠깐 공백 생길 때 차 사고 나고 수술할 일 생기고 뭐 사는 게 다 그렇다.
결국,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와주는 지인에게 SOS를 쳤다. 그의 처방은 정확하다. 바이러스를 치료하거나 부속을 갈아 고치기도 하고, 다 밀고 다시 깔기도 하고, 수술해서 쓸 수 있게 해 주신다. 의사 같다. 집으로 가져가시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다. 놀라진 않았다. 경험은 굳은살을 만든다. 같은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도 할 줄 알고 담담해지게 마련이다.
지난 시월부터 수필 줌 강의를 하고 있다. 전화기에도 줌 앱이 깔려 있으니 강의는 할 수 있으나 합평하려면 강의안을 띄워야 하는데 자료가 모두 그 컴퓨터에 있어서 불러올 수가 없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이 도져 수강생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접었다. 구글을 썼다면 전화기로도 자료 공유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내려놓기로 했다. 기계 믿지 말고 작품은 수시로 엑스트라 하드에 저장하라고 강조했는데 정작 나는 최근 자료를 저장하지 못했다. 다 날린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생님, 오늘 밤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할 일이 없겠어요.”
수강생 중 한 분이 내게 문자를 남겼다. 컴퓨터가 없다고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전화기로라도 써서 넘겨야 할 원고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돌아보니 작가가 된 후 늘 일이 따라다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다 보니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빴다. 사는 방식도 자가 격리형 인간으로 바뀌어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고 힘들었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문학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읽고, 쓰고, 책 만들고, 교정하고, 자료 검색하다 보면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줌 강의를 시작한 후론 수업 준비하고, 가르치고, 과제 피드백까지 하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연초에 많은 결심을 했었다. 다 이루진 못했지만 속한 단체에서 봉사하고, 체중감량도 하고, 나무달 아카데미에서 강의도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았다. 목표만큼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써서 좋은 결과도 얻었다.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남편의 외조와 딸의 응원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상금은 고마운 남편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어느새 2022년의 끝자락이다. 국내외 모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비록 축구는 아쉽게 졌지만 끔찍했던 코로나의 터널을 벗어났고 우리에겐 또 다른 새해가 올 것임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이마다 남은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시고 기쁜 성탄을 맞으시길 바라며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소망해본다.
집을 비운 사이 우리 집 배롱나무에 단풍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엔 대설이 내렸다는데 내가 사는 곳은 동짓달임에도 만추 같다. 잎새마다 세상의 가을 색이 오롯이 담겨 얼마나 고운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빗물을 머금은 잎들이 바람 불 때마다 떨어져 낙엽이 된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나는 모습이 처연하고 아름답다. 나는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게 시였으면 좋겠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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