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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아름다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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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2-11-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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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에도 우리 집 분꽃은 분주했던 여름 여행을 마치고 실한 열매를 맺었다. 

지난번에 씨를 한바탕 거두었는데도 여전히 많았다. 아직도 전해줄 게 남은 모양이다. 뜨거운 텍사스의 땡볕과 가뭄을 견뎌낸 분꽃은 이제 기력이 쇠했는지 대가 휘고 가지가 인도까지 내려와 배를 깔고 누웠다. 차마 꽃을 밟지 못하여 동네 사람들이 넘어 다녔다. 하는 수 없이 화단 정리를 했다. 남편은 전지가위로 대를 자르고, 나는 분꽃이 남긴 씨를 거두었다. 아보카도처럼 까맣게 영근 씨를 한 알이라도 떨굴세라 조심스레 골라 담았다. 

 

어느 해 씨를 잘못 보관해서 곰팡이가 생겼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올해는 작은 빨래 망을 준비해 씨를 넣고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매달아 놓았다. 흰 주머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보니 아버지 한약방에 수없이 달려 있던 약제 봉지가 떠올랐다. 어찌 아셨을까. 그렇게 매달아 두면 상하지 않고 잘 마른다는 걸. 말려야 할 것과 말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어느 것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관하셨던 아버지. 딸내미 운동화 하나도 함부로 널지 않으셨던 그분의 지혜가 이제야 보인다. 

 

아버지는 약방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지혜로우셨다. 돈보다 사람을 귀히 여겨 이문을 남기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에겐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특히나 산골에서 약재를 가지고 오는 분들에게는 후한 값을 쳐주고 밥도 사 먹이셨다. 당신 주머니를 털어 환자나 어려운 약초꾼의 필요를 채워주었던 아버지를 겪어 본 사람은 지금도 아버지의 선행을 고마워한다. 아버지가 심고 뿌려 맺은 열매를 자식인 내가 거둘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십분의 일이라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 물질과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재주로 애써보지만, 늘 역부족이다. 이제 그만해야지 했다가도 막상 눈앞에 보이면 하게 되니 아버지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모양이다. 

 

올해도 이 선생님이 결명자를 챙겨주셨다. 당신은 그 차를 매일 마셔서 그런지 팔십이 넘었는데도 돋보기를 안 쓴다며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니 열심히 끓여 마시라고 건네주셨다. 매년 감을 따다 주며 감 먹고 감 잡아서 좋은 글 쓰라는 분도 계시고, 잠이 오지 않아 다듬었다며 콩나물을 건네주는 분도 계시다. 그런 사랑을 받을 때마다 나누는 것을 기뻐하셨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대신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전엔 결명자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땅에서 자라는 건지, 나무에서 자라는 건지 몰랐다. 이젠 안다. 그 가늘고 긴 꼬투리 속에 나란히 누운 결명자 씨를 얼마나 조심하며 거두었는지, 행여 그냥 주면 안 먹을까 봐 얼마나 조심하며 덖었는지, 그 작은 씨를 얼마나 모아야 한 병이 되는 건지, 높은 가지에서 감을 따고 썰어 말려서 지퍼백 한가득 주려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지 말이다. 대추 한 알, 채소 한 줌에서도 나를 챙겨주시는 그분들의 사랑이 느껴진다. 

 

열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거두게 되는 열매. 농작물이나 과실뿐 아니라 사람의 일도 그러하다. 아마 상도 열매 중 하나일 것이다. 페이스북 친구가 대부분 작가다 보니 출간 소식과 수상 소식이 많다.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생각했었다. 상은 보너스 같은 거여서 받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상이 노력의 열매처럼 느껴졌다. 뭔가 결과물이 없으면 노력을 덜 한 것 같은 부담이 들면서 자책에 빠지게 되었다. 나름대로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살지 하는 생각이 들자 속이 상했다. 그러다 깨달음이 왔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초심으로 돌아오니 세상이 다시 밝았다. 

 

아마 이 선생님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남들은 다 결과물을 만드는데 나는 뭐하며 살았나 생각하니 속에서 부아가 끓더란다. 그래서 선생님은 늦은 나이에 시인이라는 날개를 다셨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인이셨다. 왜 그런 잣대가 필요한지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세상의 잣대가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열매로 선생님의 프로필이 한 줄 늘었다. 다음엔 어떤 열매가 그곳에 열릴지 기대가 된다. 무슨 열매가 되었든 나를 아껴주시는 분들이 연말에는 좋은 열매를 거두셨으면 좋겠다. 

 

잘려 나간 분꽃 밑둥지가 서늘하다. 하지만 내년 봄이면 그곳에서 새로운 잎이 돋아나고 고운 꽃이 필 것이다. 분꽃은 내게 뿌리만 죽지 않으면 산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마 초심도 그러할 것이다. 잠시 흔들릴 수는 있으나 다잡으면 굳건히 서는 것이다. 써머 타임도 해제되고 어느새 조석으로 날이 차다. 올해 끝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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