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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봄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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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3-03-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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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수고해!” 

 한 마디 던져놓고 남편은 가게 문을 밀고 나갔다. 봄 마중에 한창 열을 올리는 중이어서 바쁘다고 했다. 

어제도 거름흙을 몇 포대 사다 화단에 뿌렸다더니 오늘도 몇 포대 더 사다가 마저 뿌리고 화단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언니가 준 도라지 꽃씨를 뿌려 내가 좋아하는 도라지 꽃밭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백수가 더 바쁘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엊그제는 빨간 꽃 화분을 사다가 뒤란에 매달아 놓고 자랑하길래 좋은 척 환한 얼굴을 했더니 기분 좋은지 나를 끌고 나가는 게 아닌가. 잘 손질된 화분 몇 개가 나란히 나와 있어서 저기에는 뭘 심었냐고 물었더니 달리아를 심었다고 했다. 

시골집 앞마당에 무성했던 달리아가 생각난 걸까. 그러면서 여기저기 집어 보며 무얼 심으면 좋으냐고 물었다. 어느 해 봄이었다. 엄마와 함께 이것저것 꽃을 사다 심어 놓고 흐뭇하게 자고 난 아침이었다. 

전에 없이 호들갑스럽게 부르는 엄마 목소리에 정신 없이 나가보았더니 글쎄 밤새 꽃이 다 잘려 나가고 꽃대만 남아있는 게 아닌가. 흐뭇해서 자는 사이에 토끼가 그 많은 꽃을 똑똑 다 잘라 먹었던 것이었다. 

꽃을 심어 놓기가 무섭게 토끼한테 뜯기고 난 뒤부터는 별 재미를 못 보아서 신통치 않게 “글쎄, 살아남을까? 당신이 알아서 하슈.” 했더니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풀어놓느라 신이 났다. 

긴 세월이었다. 28년을 열고 있었던 2호 가게를 닫았다. 코로나19 직격타로 흔들리던 차에 마침, 가게 리스 계약 기간도 다 되어서 접기로 했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가게에 갇혀 지내는 남편에게 더 늦기 전에 자유를 주고 싶었다. 자유로운 영혼이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을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아직은 둘이 함께 자유롭게 살 수는 없는 상황이니 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불을 붙이기로 했다. 

28년을 정리하고 나오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쌓인 먼지만큼이나 추억도 많은 탓이리라. 낯선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만나 정 붙이고 서로 의지하며 위로받던 소중한 일터였고. 낯선 땅에 뿌리 내리고 잘살아 보겠다고 전우애로 똘똘 뭉쳐 고군분투하던 전쟁터였다. 

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을 주인보다 더 주인답게 일하시다 정년퇴직한 애릭 아줌마를 비롯해 앤젤라 아줌마. 

가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 하시는 구 아줌마. 두 아이를 키우며 그저 묵묵히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란이 언니, 언니처럼 아껴주고 사랑해준 친구 숙영 씨. 이젠 어디서 마주쳐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나칠 것 같은 윌리 아줌마, 이젠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하는 여러 언니, 아줌마들까지 초보 이민자들의 이력을 장식해준 곳이 아니었던가. 긴 세월을 나보다 주로 남편과 함께했던 곳이기에 마무리하는 것도 남편에게 맡겼다.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았던 성을 허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던 모양이다. 큰오빠가 데려온 2명의 임부와 함께 넷이 이틀 동안 들어내고 뜯어내고 털어내 정리하고는 결국 드러눕고 말았다. “이제, 누운 김에 좀 쉬어도 돼.”

남편에게 다시 봄이 온 모양이다. 일 마치고 집에 오니 씻어 논 반찬통이 부엌에 한가득이다. 몸에 좋다는 갖은 야채와 과일을 사다 냉장고를 채워놓고 내일부터는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어 주겠다고 법석을 떤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모습도 볼만하다. 요즘은 부추무침이 저녁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매일 한 움큼씩 뜯어 씻어 놓고는 멸치 액젓으로 살짝 무쳐 달라고 애교를 떤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몸에 배어 있던 단물이 출렁이는지 그의 바닥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나 보다. 그에게 없었던 감각들이 미리 알고 마중 나온 모양이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죽어가던 것들이 살길을 다시 찾은 것일까. 부끄러움까지 까치발을 하고 서성이는지 얼굴 가득 꽃물이 번져 홍조를 띠고 있다. 

몸에 잘 감기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처럼 조금은 어색한 시작이지만, 그의 인생의 덧칠을 위한 준비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응원해 주기로 한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당신이라는 이인칭으로 우리라는 삼인칭으로 살던 삶에 사라지고 잃어버렸던 일인칭, 나라는 삶을 다시 살아볼 기회를 그에게 주고 싶다. 어떻게 땅을 일구고 무슨 씨를 뿌릴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머지않은 날에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알게 되지 않을까. 

전남 구례 대 화엄사 홍매화가 만개했다는 소식과는 다르게 올봄에는 돌배나무꽃을 보지 못했다. 

피었다 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느새 연두 이파리가 무성하다. 

나만 못 본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 남편에게 물었더니 똑같은 답을 한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하여튼 이상하고 적응이 안 되는 봄인 것은 분명하다. 

 

마중의 힌트      / 김미희

 

올라오겠다는 그의 말에 내가 터졌지

마중 나간다는 나의 말에 그가 뭉그러졌지

 

딸기를 씻는데 

서로 밀착되었던 부위가 터져 있는 것을 볼 때처럼

그렇게 몸에 배어 있던 단물이 빠져나가고

우리의 닿았던 껍질이 쓰리게 벗겨진 채 

속살이 바닥으로 기어 나와 비비던 

더 쓰라리기 위해 그랬던 참는 것이 아직 있다는 것은

내 속에 없던 감각들이

죽는 순간에야 생각나 다급하게 후회할

아니 지금에야 죽어가는 것들로

더 살고 싶었던 것들이었구나 싶게

부끄러움으로 까치발을 하며 울어야 하는 묘한 난처를

거부함 없이 내가 되어버릴 그를 허탈이 되지 않게 할 것이다 

 

한 몸을 허물고 

몸에 잘 감기지 않는 늦게 찾아온 서로를 두르느라

알 수 없는 음률을 부딪는 전두엽끼리 

단 하나의 입술로 맞춰가기 위해

창가를 서성이는 자유 한 리듬의 발길을 상관치 말고

이제는 서로를 향해 밝히는 조명으로

서로의 덧칠을 위한 의미를 비춰보자  

 

그렇게

그렇게 되게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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