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국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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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까?” 꿈인 듯 생시인 듯 잠 속에서도 추위를 느끼며 밤을 보낸 아침, 눈을 뜨면서 내게 하는 첫 질문이었습니다.
자주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늘 묻고 싶었던 질문, 평생을 품고 온 질문이 추위에 견디면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첫 질문이라고 해서 답이 떠오를 리는 만무합니다.
얼마나 웅크리고 잠을 잤는지 기지개를 켜는데 몸이 펴지질 않습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 벌써 갈아입은 두툼한 잠옷과 수면 양말이 소용이 없으면 어쩌나 생각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에어컨 아래서 일을 하다 보니 히터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도 히터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니, 지난여름이 정말 길고 잔인했던가 봅니다.
구겨진 몸을 생각해서 오랜만에 공원 산책을 하기로 했습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버릇처럼 썬크림을 펴 바르고 모자를 눌러썼습니다.
해가 뜰 무렵, 얼마 전부터 나는 이 시간이 좋아졌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잘 만나 볼 수도 없던 시간이었고 작년보다 더 야행성이었던 젊었을 때는 절대 일어나 움직이는 시간이 아닌, 내게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빛이 낮게 엎드려 있는 시간. 아직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은 빛이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으로 걸어와 모든 사물에 그림자를 채워주는 시간. 이 순간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누워있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일어서는 것 같아 가슴이 떨립니다.
공원 산책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항상 가던 길 말고 오늘은 풀숲을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무들은 저들만 물들이는 게 아니라 세상까지 물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나도 오늘의 나무만큼만 가벼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지나가고 또 지나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들립니다.
가끔 조금 세게 사선으로 부는 바람은 오늘따라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가슴을 씻겨주고 머리를 맑게 열어줍니다. 오늘은 쫓기듯 걷기보다는 마실 나온 사람처럼 여유를 부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 시간이면 족했던 산책길이 오늘은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가끔은 나사 하나쯤 풀어놓고 느긋해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도 좋습니다.
집에 당도하니 대문 앞 노란 국화꽃이 팝콘을 튀겨 놓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몽글몽글 꽃망울들의 소곤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났길래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웃음이 터진 걸까요. 궁금해 국화꽃 앞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나도 따라 웃어봅니다.
가만가만 꽃잎을 어루만지는데 어릴 적 엄마 치마폭에서 묻어나던 냄새가 콧등을 치며 달려듭니다. 영락없는 엄마 냄새였습니다. 그 옛날 엄마한테 조르듯 무슨 이야기였는지 알려달라고 떼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국화꽃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은 채 슬슬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는 바로, 매일 아침 그냥 지나쳐 가는 나를 불러 옆에 앉히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을볕에 앉아 국화꽃 향기에 취해 한나절쯤 쉬다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매일 바쁜지 잠시 쉴 틈도 없이 아침에 나가면 달이 떠야 들어오는 내 일상이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이렇듯 자연은 심심찮게 우리의 일상을 엿보다가 엄마 치마폭에 묻어있던 국화꽃 향기로 손짓합니다.
삶에 지쳐 허덕일 때면 붉은 단풍도 책갈피에 끼워주고 눈사람도 한두 개쯤 만들게 합니다. 그러면서 늘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서 슬그머니 내려다 보시는 진짜 하나님과 눈 맞출 때도 있습니다. 바쁘게 걷던 걸음을 돌려 샛길로 들어서면 작년에 만났던 쑥부쟁이와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가을이 좋은 건 노란 국화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꽃이 피고 진 다음 늦게 찾아와 쓸쓸한 마당을 은은한 가을빛으로 채우는 국화꽃이 좋습니다. 양팔로 안을 수도 없는 화분에 다닥다닥 정답게 피어있는 국화꽃이 있어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국화꽃을 보고 있노라면, 외롭지 않게 마음껏 정 나누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앞서지도 그렇다고 많이 쳐지지도 말고 그저 평범하게 남들과 발맞추어 가는 그런 삶을 꿈꾸게 합니다. 몸 뒤척일 때마다 연한 향기가 퍼지고 가을 햇살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가을 국화꽃처럼 말입니다.
환한 웃음이 아니어도 꿀벌 몇 마리쯤 날아와 이야기꽃도 피우는 수수하고 솔직한 모습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편하게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가을 국화꽃처럼 천천히 다가와서 오래 머물다 가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국화꽃 앞에 앉아 작년에도 그전에도 했을 생각으로 행복한 가을 아침입니다.
들국화
김미희
뜰이 비워지고 나서야
가을볕에 그은 노오란 꽃
쓸쓸해서
오히려 낭만이라고 고개를 드는가
엄마 치마폭에 묻어있던
그 향
가을이 되어서야
가을이 되어서야
내 눈시울에 비쳐지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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