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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수필]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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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작성일 23-12-2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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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졸음이 쏟아졌다. 

혈당이 좀 높다더니 이것이 바로 혈당 스파이크인가. 눈을 부릅떠보고 일어나 스쾃도 몇 개 해보지만, 생각은 증발하여 날아가기 시작했고 주변 소음들이 점점 먹먹해졌다. 

그러다 엎드려 눈을 붙였나 보다. 가까이에서 기척을 느껴 흠칫 눈을 떠보니 손님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요샌 이런 민망한 상황이 종종 생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벌떡 일어났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이것저것 권해보았다. 몇 가지 물건을 골랐는데 그 분 사이즈보다 두 치수나 큰 것을 원했다. 

그렇게 입으면 맵시가 안 날 텐데 요지부동이었다. 경험상 그럴 때 내 생각을 주장하면 일이 어렵게 되었다.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 있으니까. 손님이 취향대로 고른 물건을 계산하고 가게를 떠날 때까지 기분 좋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럴 때 나는 노련한 판매원이다. 

이제 막 이십 대로 접어든 듯 보이는 미얀마 아가씨는 팁으로 받은 일 달러짜리 지폐를 잔뜩 가져왔다. 스포츠 브라를 다섯 장 고르고 다섯 묶음을 내놓았다. 

돈은 일일이 세어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조지 워싱턴이 보이게 모으고 마지막 지폐를 접어 십 달러씩 구별해 왔기 때문이었다. 

물건을 건네주니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입을 거예요 하며 순박하게 웃었다. 풋풋한 그 아가씨는 십 달러 묶음이 늘어날 때마다 복숭아빛 미소를 지으리라. 

부지런히 일하는 만큼 착한 배우자 만나서 노후 걱정 없는 삶을 살길 마음속으로 축복했다.

멕시코 남자와 결혼한 한국 손님은 사십 년 동안 가구점을 하며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멕시코에서 가구를 만들어 보냈고 그분은 직원들과 그것을 팔았다. 의리 있는 멕시코인들과 가족이 되어서 좋았다고 했다. 

최근엔 매상이 많이 줄어 장사를 접으셨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건물의 주인이었다. 

가게는 그냥 넘겼지만, 이제부터 풍족한 월세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쉬지 않고 얘기하더니 시작했을 때처럼 갑자기 말을 끝냈고, 이제 장사하세요 하며 나가셨다. 오늘 이야기 분량이 찼나 보다. 

국제결혼을 한 손님들은 종종 한바탕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한다.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했다지만, 환하고 예쁜 얼굴 어디에도 고생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여 성공적인 은퇴를 한 사람의 얼굴은 지루한 장마 끝에 갠 하늘같이 말갛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게에 있다 보니 다양한 스토리를 알게 된다. 넋이 빠져 듣게 될 만큼 흥미진진한 사연도 있다. 어떤 것은 단편 영화 한 편이 그려진다. 생각해 보면 인생이 드라마이고 영화다. 

당장 내 인생만 가지고도 꽤 흥미로운 몇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주제별로 묶어서 제목을 붙인다면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쌓일 것이다. 

역할도 가지가지다. 아기에서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었다가 중년을 지나 노인이 되니 우리는 모두 그 역할 중 어느 지점에 있다. 

동시에 여러 역을 감당하기도 한다. 나는 이민자이며 사장이고 부모이며 자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을 해볼 수는 없다. 사기꾼, 도둑, 폭력배, 살인자 등은 다른 이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언,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등은 기독교에서 십계명으로 금하고 있다. 

불교는 오계를 지키도록 가르친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가 그것이다. 

술과 마약을 금하는 불음주 계율 말고는 살생, 도둑질, 간통,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점이 기독교와 흡사하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십계명은 3,500여 년 전, 오계는 2,6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사회적 금기 사항이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한 규칙은 단순한 만큼 단호하고 분명하다. 

우리는 남을 해치거나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분 제도가 있던 과거에 비해 세상이 좋아져서 이젠 사람 사이의 규칙을 지킨다면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것은 드라마틱하며 때론 혹독하기도 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더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성공했다고 자만할 일이 아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다고 절망에만 머물 일도 아니다. 필름은 계속 돌아가고 내 영화는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늘의 영화를 찍는 것처럼 살고 싶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마지막 날숨이 새어나가면 나의 영화는 마침내 끝이 날것이다.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이 평점을 매기겠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그는 자기 역할을 즐겼다고, 그것을 보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고 호평을 받았으면 좋겠다. 신나는 것은 내 영화에선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2024년엔 무슨 장르를 찍게 될까. 

 

백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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