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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돌아오는 길

Last updated: 12월 23, 2022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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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밤을 연이어 열두 시간씩 자고 나니 온몸을 헤집던 돌풍이 가라앉은 듯 조용해졌다. 거칠게 올라오던 기침도 줄었다. 

약에 취해 혼미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오는 중인지 눈까지 밝아지는 기분이다. 꼭 이렇게 나이 먹었다는 티를 내야 하나 보다. 아무튼 두 주 놀고 와서 두 주 호되게 경을 치렀으니 놀고 온 값은 톡톡히 치른 셈인가. 

길 떠났던 마음도 과장되고 들떠있던 언사들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는 적당량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한밤중에 깨어 낯선 나를 만나고는 깜짝 놀라기도 하니 말이다. 

집을 떠나 온갖 곳을 쏘다니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은 나이를 더할수록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하지만, 즐겁고 기쁜 여행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콜록거리면서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즐거우면 그건 좋은 만남이 맞는 것이다. 먹기 전보다 먹고 난 후가 더 좋다면 그 음식은 좋은 음식임이 분명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여행은 즐거웠던 게 분명하다.

이번 한국행은 어느 때보다 일정이 빡빡했지만, 알찬 여행이었다. 우려했던 건강검진 결과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3박4일 해외지역회의도 좋았다. 사려 깊고 부지런한 룸메이트 이 교수님 덕분에 아침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서로 잘 챙겨주고 함께한 우리 팀들 덕에 하루도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기쁜 일은 또 있었다. 

40년 만이라야 맞을 것 같다. 그곳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인데 친구는 상고를 가고 나는 여고에 가는 바람에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중국 칭다오협의회 상임위원으로 참석했다. 셋째 날 아침 식사하러 내려갔다가 만났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주근깨 얼굴이 여전히 곱고 보기 좋았다. 중학교 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소식도 들려주는 걸 보니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아 조금 부럽기도 했다. 

 33년 만에 형님도 만났다. 그러니까 남편의 둘째 형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1988년에 결혼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시 조카가 이젠 그때 저만한 세 아이를 둔 중년이 되어 얼마 전에 연락해 만나게 된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 한국에 다니러 갈 때면 시부모님만 찾아뵙고 겨우 내 볼일만 보고 돌아왔으니 소식이 잘 닿지 않는 시댁 식구들까지 챙길 엄두도 못 냈었다. 

우리가 안면도에서 신혼살림을 할 때 그 형님네도 안면도에 살았다. 주말이면 꽃지나 방포,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산낙지 해삼 멍게 등 바로 잡아 올린 싱싱한 것들로 푸짐하게 먹여주시곤 했다. 머지않아 미국으로 돌아갈 나를 위해 자주 불러 챙겨주셨다. 그랬던 형님인데 살다 보니 서로 소식도 모른 채 30년을 지냈다. 

형님은 저녁밥을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손수 담근 간장게장을 내놓으며 익지 않은 것 같다면서 미안해했다. 

마치 친정엄마라도 된 양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법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챙겨주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미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형님은 안면도에서 마당발이었다. 부동산 투기 바람이 한창일 때 안면도 터줏대감인 친구분들과 함께하는 부동산 투자에 나도 태워 주었다. 

결혼 전에 모은 돈을 건네며 노후 대책을 부탁드린 나는 매년 가을, 타작을 마치면 형님이 전해드리는 쌀 몇 가마니로 시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어디 사람 사는 일이 쉬운 일인가. 계획대로 되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몇 해 지나지 않아 쌀 몇 가마니는 더 이상 없었다. 

그 후 나는 거짓말처럼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데 형님은 그 일로 아직도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형님, 노후까지 갈 복이 아니었나 봐요. 괜찮아요. 세상일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나를 만나고는 꿈만 같다며 이산가족 상봉이나 한 듯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던 형님이면 된 것 같다.

짧은 여행 중에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마침, 큰 새언니도 한국에 나와 있을 때라 생전 처음 언니랑 팔짱 끼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점심을 먹고 쇼핑을 했다. 

서울에 사는 여느 여자들처럼 둘이서 느긋하게 한나절을 보낸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니 가끔 큰오빠가 불러 얼굴 보며 저녁 식사는 같이했지만, 점심을 먹고 쇼핑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푸석푸석하고 틀에 박힌 내 생활에 촉촉한 추억 몇 개 담아오면 근사한 여행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서울역까지 달려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출구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월을 거슬러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정말 근사한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 허둥댄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으니 천천히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어디에서건 낯선 채로 살아도 될 것 같다. 

챙겨온 추억 몇 개로 근근이 살아가다가 또 살기 싫을 만해지면 추억 몇 개 주으러 떠나면 되지 않을까. 더러 안 해본 짓도 해보며 그렇게 나의 우울을 다스리며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움 없고 기다림 없으면 어찌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너를 만나     / 김미희

 

민들레 홀씨도 품어주던 하늘

바다가 그 하늘을 바라 마주보고 눕듯 모래밭에 누우리

 

진물 흐르던 시절을 촘촘히 박아 간직해두었던 

첨삭도 하지 않은 말들 모두 풀어

차라리 파도 소리 덮칠 때쯤 큰소리로 외치리

사랑한다고

 

점자처럼 더듬던

뜯어낸 바늘구멍 같은 오래 멈춰있던 말줄임표

손끝에서만 바람 소리로 맴돌던 주어가 빠진 문장들에

가끔 쉼표도 붙여

매듭 가득한 나를 풀어 네 몸속에 오래 흐르게 하리

 

낯선 것에 길드는 동안

하얗게 얼어있던 그리움의 뇌수는 그어놓은 분계선을 넘어 너를 깨우고

목말라있던 너의 심장을 돌아 늑골을 텅텅 울리며 흐르게 하리

늘 너의 발목을 잡아 돌던 원심, 

그 점을 반으로 갈라 바다에 띄우고

파도가 숨죽일 쯤에 가만히 말하리

그리웠노라고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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