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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전문가 칼럼

새해 단상(斷想)

Last updated: 1월 10, 2020 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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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 파릇한 미나리싹 봄날을 꿈꾸듯 /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김종길 / 설날 아침에)

그렇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나무는 땅 밑의 단단한 뿌리를 믿고 북풍한설을 견딜 수 있으며, 시냇가 물고기 들은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얼음장 아래 물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
오래 전 식당을 하던 이모집에는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수아’라는 언니가 있었다. 지리산 어느 깊은 골에서 식모살이를 하러온 언니는 추운 겨울이 되면 유독 두 볼이 빨갰는데, 언니의 손은 하루종일 설거지를 한 탓에 늘 퉁퉁 부어있었고 벌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14살 어린 소녀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의 집 살이를 하러 온 것이었는데, 의외로 수아언니의 표정은 늘 밝았다. 수아언니의 엄마는 장날에 언니를 데려오면서 언니의 일 년치 월급을 몽땅 받아갔는데, 그 뒤로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아언니는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생존의 법칙을 다 알아버렸는데, 어쨌든 그 가족에게 수아언니는 봄날을 가져올 수있는 땅 밑 뿌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추운겨울이 있기에 봄에 피는 꽃은 더욱 찬란하다.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아래/ 개 발자국 아래/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장석남/살얼음이 반짝인다)

지난 해를 마감하며 경향신문에서 뽑은 올해의 인물은 ‘엄마’였다. 특히 그 엄마 중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죽은 김용균의 어머니가 포함되었다. 아들이 남긴 유품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이 엄마의 눈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비정규직 자식을 둔 엄마들을 통곡하게 만들었다.
그 아들이 남긴 소지품을 담은 박스 안에는 컵라면 3개와 세면용품, 마스크와 고장난 손전등, 값싼 과자 한 봉지가 들어있었다. 한국사회 가장 낮은자리에서 사는 젊은 청춘들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 사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빽 없고 힘없는 젊은이들이 위험한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이렇게 죽음을 당하고 있다. 마치 살얼음이 낀 한 겨울 강을 건너는 것처럼,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죽음의 외주화에 내몰리고 있다.

텍사스에 오래 살게 되면서부터 겨울이면 볼 수 있는 풍경들,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나 눈사람, 미끄런 골목길, 장독대 위에 낀 살얼음 같은 건 잊게 되었다. 기상캐스터가 전해준 날씨를 보며 옷의 두께 정도나 집안 온도를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다.
가끔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둔 차 위에 살얼음이 낄 때가 있는데,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의 더운 물 트는 소리로 짐작만 할 뿐이다. 시인의 살얼음은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트럼프 타워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살얼음이 반짝거린다. 새해는 이 살얼음을 녹여줄 따뜻한 손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도종환/ 눈 내리는 벌판에서)

유년시절, 명절 때 가는 큰댁은 순천시에서 한참 떨어진 ‘짐대골’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어른들 말로는 큰아버지도 아닌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큰어머니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시내에 있던 집은 빚쟁이들에게 다 넘어가고 그곳으로 쫓겨갔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명절이나 제사 때 그곳에 가는 일이었다. 당시 그곳 가는 버스는 아예 없었고, 택시도 잘 가지 않으려했다. 그나마 추석 때는 좀 멀어도 날씨가 선선하니 괜잖았는데, 설날 때 가는 것은 그야말로 히말라야 등반 가는 것처럼 단단히 무장을 하고 가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이면 정말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지고 거센 눈보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엉성하게 털실로 짠 모자나 귀마개로는 동지섣달 샛바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난 고개를 있는대로 푹 숙이고 소나무 숲이 있는 곳 까지만 가자고 늘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엄마 손을 꼭 붙잡았다.
거기까지 가면 큰댁은 거의 간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 뒤 도착한 큰댁엔 군불 땐 따뜻한 방과 친할머니의 미소와 우리를 반기는 친지들과 쑥떡과 홍시, 쌀강정, 부채과자 등 먹을 것이 그득했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을 일이 별로 없는 이즈음 그리운 사람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운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각종 건강지표에도 건강한 인간관계는 면역력을 향상시켜 질병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경자년 새해도 벌써 일 주가 지났다.
하얀 쥐의 해, 풍요와 번영의 상징인 영리하고 부지런한 쥐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 “알렉사! 플레이 얼리 모닝 뮤직(Play early morning music)!”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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