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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데스크칼럼

[기자의 눈] 가을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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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5-11-15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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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국장 최현준
보도국장 최현준

요즘 달라스의 날씨가 정말 좋다. 아침이면 서늘한 바람이 공기를 가르고, 낮에는 햇살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감싼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느리게 흘러간다. 가을이다. 완연한, 그리고 짙은 가을이다. 


나는 이 계절을 참 좋아한다. 단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때문만은 아니다. 가을이 되면 마음이 묘하게 차분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평소에는 무심히 흘려듣던 노래의 가사가 가슴에 와닿고, 세상의 뉴스와 논쟁도 어쩐지 한발 떨어져 바라보게 된다. 흔히 봄은 여자의 계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말이 나에게는 그대로 적용되는거 같다.


몇 해 전 가을, 영국에서 들려온 뉴스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테리사 메이 당시 총리가 ‘외로움 대응 전략(A Strategy for Tackling Loneliness)’을 발표한 것이다. 국가가 국민의 외로움을 관리하겠다는, 세계 최초의 정책이었다. 정부는 1,800만 파운드 (약 2,000 만 달러)를 투입해 커뮤니티 카페, 작은 공원, 예술 작업실을 세우고,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해 우체부가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말벗 서비스’를 운영하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외로움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사회적 처방(social prescribing)’을 내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처방은 약이 아니라 “함께 걷기”나 “동호회 가입”이었다. 결국,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써 외로움을 줄이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는 외로움조차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된 걸까? 외로움이야말로 인간 내면의 가장 개인적 영역인데, 국가가 어떻게 그것을 ‘정책’으로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국가가라도 그 온기를 지켜보려는 시도는 어쩌면 절박하고 또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영국에는 세계 유일의 두 장관이 있다.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과 ‘자살예방 장관(Minister for Suicide Prevention)’이다. 지금은 명칭이 조금 바뀌었지만, 그 역할은 여전히 보건·복지 분야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영국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 6,600만 명 중 900만 명 이상이 늘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20만 명의 노인이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친구나 친척과 대화하지 못했고, 외로움이 영국 경제에 끼치는 부담은 320억 파운드 (400억 달러)에 달했다. 연구자들은 “외로움은 담배를 하루에 15개비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경고했다. 정말, 외로움은 이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질병이다.


가을이 되면 나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를 느낀다. 언제부턴가 한국에 전화를 걸면 “엄마” 대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엄마’라는 단어가 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엄마’의 존댓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은 ‘엄마’를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엄마’라고 부를 때 비로소 고향 냄새가 난다. ‘엄마’라는 말 속에는 그 어떤 호칭에도 없는 따뜻함이 있다.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고향의 냄새이고, 돌아갈 곳의 기억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마지막 말은 대부분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 엄마를 보고 싶다.” 그건 국적도, 이념도, 시대도 초월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일본군들도, 증언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에 외친 말은 “천황폐하 만세”가 아니라 “오카상(어머니)”이었다고 한다. 그건 국적도, 이념도, 시대도 초월한 인간의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정한모 시인은 그의 시 「어머니」에서 처음과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이 한 줄은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을, 사랑을, 그리고 헌신을 설명한다. 자식의 고통을 품고 눈물로 감싸는 존재, 그 눈물이 세월을 지나 빛나는 진주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본 가장 가슴 아픈 편지는 세월호 희생 여학생의 어머니가 남긴 글이었다. 


“엄마가 죄인이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이 짧은 문장 속에 인간의 절망과 사랑, 그리고 세상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고백이 담겨 있었다.


가을의 공기는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는 따뜻한 여백이 있다. 어쩌면 그 여백이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외로움을 관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진짜로 덜어주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리움이, 대화가,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하나가 가장 확실한 처방이자 위로가 된다.


달라스의 푸른 하늘 아래, 나는 오늘도 지독한 가을앓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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