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고대진] 무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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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전공인 수학책 사이에 당시(唐詩) 선집을 들고 다니던 나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문학 전공인 동아리 후배가 그 책에서 자기가 읽은 감명 깊은 당시(唐詩)를 이야기해 주었다. ‘무덤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읽었는데 ‘누구도 돌보지 않아 풀이 무성한 무덤에는 후손이 끊긴 사람들의 쓸쓸함이 있고 그대를 만나 안타깝게 서로를 바라보다 이별하던 추억이 있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무덤이라는 으스스한 제목에서 따스한 사연이 느껴져 무덤이라는 것이 하나도 무섭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던 사람과 만나던 따스한 장소로 느껴졌다는 말이었다. 나도 그 시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별로 없던 무덤에서 만나는 안타까운 사연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지고 다니던 시집을 잃어버린 후 이 시를 찾아보려고 다른 당시(唐詩) 전집들을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시인 이름도 기억을 못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 가도 이 시가 생각나 무덤의 주인공과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무덤이라는 말이 무섭지 않게 만드는 시가 또 있다. ‘잔디/ 잔디/ 금잔디/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금잔디>이다. 심심산천에 있는 그리운 가신 님의 무덤, 시의 화자는 이 무덤을 찾는다. 무덤은 깊고 깊은 산 중에 있지만 님의 무덤이라 무섭지 않다. 아마 자주 찾아왔으리라. 깊은 산속에 봄이 찾아오고 파랗게 돋아난 금잔디를 보니 파란 불이 붙은 것 같다. 죽어 말이 없는 그 사람의 무덤가에서 화자는 몸부림치며 가슴에 불을 지핀다. 깨끗하고 애틋한 감정을 자아내는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필자가 입학한 연세대학교는 아름다운 캠퍼스로 잘 알려졌다. 산책할 수 있는 곳도 많았다. 문학을 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찾는 윤동주 시비가 있는 숲이 있었고 이양하 작가의 명수필 <신록 예찬>의 배경이 되는 청송대(聽松臺)가 있었다. ‘소나무 소리를 듣는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청송대에 앉아서 봄을 즐기는 것을 사랑했던 이양하 교수는 말한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털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만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루 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이 글 속의 장소가 청송대다. 나도 소나무 소리를 들으며 숲을 즐겨 걸었다.
숲에서 거닐다 따스한 햇빛이 그리우면 대학교 안에 있던 큰 무덤을 찾았다. 이 무덤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이었다. 이 무덤은 학교 부지 안에 있는 문화재관리국 소유의 땅이어서 잔디 관리도 잘 되어 봄이면 ‘잔디 잔지 금잔디’를 외우는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다. 학생들이 묘의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데이트를 하기도 해서 묫자리 훼손이 문제로 지적되어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봉분터에 학교 교회 건물인 루스채플이 새워지기 전에는 우리가 누워서 하늘의 구름을 보며 이야기하던 잔디밭이었다.
왕능같은 큰 무덤이 없는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은 밭 한가운데 소나 말이 들어가지 못하게 돌담에 싸여있다. 바닷가에 있는 돌담에 싸인 무덤은 배를 타고 나갔다 사고를 당한 어부들의 무덤이 많다. 특히 생각나는 무덤으로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넓은 언덕) 애기무덤‘이 있다. 해안마을 북촌리는 1949년 1월 17일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4.3 항쟁이 일어났을 때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448명(2021년 기준)이 희생된 곳. 그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어린 영혼들도 있었다. (4·3 당시 제주도에서는 10세 미만의 아이들 818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는 당시 희생된 아이의 봉분이 있다.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은 이렇다할 조경이나 장식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곳에 올 때마다 아기무덤에 동백꽃을 바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귀천’이란 시를 바치고, 또 누군가는 바람개비를 바치고 누군가는 ‘맛동산’ 과자들을 무덤에 바치고 간다고 했다. 초라한 작은 무덤들. 여기만 가면 애달프다 못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어릴 때, 사람이 죽으면 동네 밭 가운데 있는 묘지에 묻히는 줄 알았다. 도시로 나오고 나서야 조경과 추모 기능을 갖춘 민간 공원묘지가 생기고 타원형의 묘가 평평한 평장 묘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화장률이 90%로 늘어난 요즘에는 봉안당이 생겨 무덤 대신에 화장한 재를 담은 그릇을 보관하는 곳이 생겨서 관리하기 편하게 하는 곳이 만들어졌다. 금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모신 봉안당은 마치 공원 안에 카페에 간 것 같은 공간이었다. 무덤은 완연히 작아졌고 우리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서 느끼던 친밀한 무덤이 봉안당이 아닐까?
나의 무덤은 봉안당 보다는 더 큰 곳으로 정했다. 태평양 바다. 찾아올 후손이 없는 나에게는 잘 맞는 곳이다. 찾아올 사람도 없겠지만 혹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먼바다를 보며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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