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잡초를 뽑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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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100도가 넘는 날이 두 달이 되고 보니, 남아나는 채소가 없다. 호박잎은 진즉에 누렇게 돼버렸고, 깻잎은 잎 가장자리부터 타들어가 누가 일부러 말아 놓은 것 같다. 오이도 역시 폭염에 줄기째 시들어 버렸고, 근대와 갓은 휴가를 다녀와서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와 중에 언제 씨를 뿌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멜런 한 개가 날 좀 보소 하는 폼으로 허브화단 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단단한 껍질을 벗기고 보니 아주 정체불명의 맛이 났다.
멀리서 보면 채소밭 전체가 흉년이든 논처럼 쩍쩍 갈라지고 빈 쭉정이만 남은 것이, 몇 십년만에 왔다는 폭염을 실감나게 한다. 그런데 밭이고 화단이고 무성하게 잘 자란 것이 딱 한 가지가 있다. 잡초다.
하루 세 번 스프링클을 작동시킨 효과가 온통 그것에게 다 간 것인지 구석구석 수풀을 이루고 있다. 채소밭은 말 할 것도 없고, 앞마당 정원에도 올해 심은 꽃과 함께 자라 어떤 것은 키가 한 뼘이나 되는 등 무한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아무리 정원이 근사하고 꽃들이 많아도, 잡초가 많은 집을 보면, 어쩐지 주인이 게으르거나 너무 바쁘거나, 무신경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런 오해를 받기 싫으니, 밀짚모자를 쓰고 날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는다.
하지만 솔직히 그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나는 가끔 속이 복잡하거나, 심란할 때면 잡초를 뽑고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누구한테 말하기도 애매한 문제가 생기거나, 소통의 부재로 답답할 때, 아니면 뭔가를 정리할 필요가 생길때면 무조건 호미를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쑥쑥 잡초를 뽑다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쓸데없는 걱정이 사라지며, 자신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된다. 멍하게 휴대폰을 보면서 남의 얘기를 듣고, 남의 삶을 엿보는 것 보다,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잘못된 인간관계를 반성하게 되고, 후회되는 결정을 한 계기를 되돌아보게 되고, 잊고 있었던 소중한 일들을 상기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간을 성찰하게 된다. 잡초가 쏙쏙 뽑힐 때 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뽑히는 기분이 들며, 땀 흘리는 것만큼 힐링이 된다.
잡초를 뽑을때는 주로 비닐장갑을 끼고 뽑는데, 때로는 호미나 삽도 필요하다. 뿌리가 질긴 나무처럼 생긴 잡초나 화단안으로 들어온 잔디뿌리는 호미로 주변을 파서 뽑아야한다.
뿌리까지 제거하지 않으면, 또 자라기에 그래야한다. 제일 골치 아픈 것 중 하나가 잔디이다.
잔디는 그야말로 야드에 있으면 톰 존스가 부른 추억의 ‘고향의 푸른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인데, 화단이나 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보기에도 안 좋지만 금새 번져서 가드너들을 제일 힘들게 한다.
생명력 또한 잡초 못지않아서 해마다 그렇게 뽑는데도, 새봄이 되면 어느새 화단으로 들어와 있다.
물론 화단과 경계선이 분명히 있지만 흙 밑으로 파고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잔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사람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엉뚱한 곳에 끼어들면 민폐가 되겠구나 하는 평범한 자각이다.
멀티 플레이어가 각광을 받는 이즈음, 시대역행적인 발상일지 몰라도, 지나치게 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사람들의 특징은 본업에 자신이 없거나, 욕심이 많거나 둘 중 하나인데, 화단속 잔디가 그런 것 같다.
식물학자들은 이 세상에 쓸모없는 식물은 한 가지도 없다고 한다. 잡초도 알고보면 사람들이 구분지어 쓸모없는 식물로 분류된 처지일 뿐, 허브도 알고 보면 잡초의 한 종류였고, 우리나라 들판에 지천으로 있는 식용나물도 대부분이 예전엔 잡초로 알려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쇠비름이나 엉겅퀴, 민들레 등 우리가 잡초로 알고 있던 식물의 효용이 알려지면서, 효소의 재료나 약용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세밀화가들이 그려놓은 세밀화를 보면 잡초들이라 해도, 어찌 그리 예쁜지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아마도 그 화가가 자세히, 오랜 시간 관찰해서 특징이나 습성을 잘 알고 그린 결과여서 그럴 것이다.
나태주시인의 시 <풀꽃1> 에서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보아야 사랑스럽고 너도 그렇다’고 했다.
꽃뿐만 아니라 사람도 오래 보아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세상의 인간관계는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나 트윗, 스마트폰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스피드가 생명이다. 이 스피드에 맞추려면 글은 자연 줄임말이 되기 십상이고 상징어나 단문으로 써야 한다.
처음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카톡을 할 때 난 속도가 느려 답을 쓰고 나면, 어느새 카톡의 주제가 바뀌어 있곤 했는데, 요즘은 많이 빨라졌다.
하지만 이런 카톡 대화를 나중에 읽어보면, 생각의 깊이가 너무 단순하고 피상적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질긴 생명력 하면 잡초를 따라갈 식물이 없다.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서고 콘크리트 벽사이나 보도블럭홈등 아주 작은 틈새만 있어도 그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다.
오늘 아침에도 말라죽은 백일홍이 있던 화분에 잡초들이 우후죽순 돋아나 있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내는 잡초를 민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장미가 아니라 이름 없는 들풀이었다. 팔월 아침, 잡초를 뽑는 시간, 온 사위는 조용하고 뜨거운 태양만이 나와 잡초 사이를 비추고 있다. 차안(此岸)을 너머 피안(彼岸)의 언덕이 바로 이 곳에 있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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