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지워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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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듣기 버튼이 눌린 오디오북처럼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심중에 저장해둔 이야기가 많았던 걸까? 아마도 그 책에는 쉼표가 없는 듯했다.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누군가 보이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경계하기도 하고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마음대로 호칭을 붙어 상대를 부르기도 했다. 그 덕에 사촌 언니는 졸지에 이모의 언니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닮긴 했는데, 이모 눈에는 큰이모와 많이 닮아 보이는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건 치매를 앓는 이모가 자신의 언니를 기억했다는 거였다. 기억의 회로 속에 누가 지워지고 누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잊은 건 분명했다.
조카 중에서도 나를 어여삐 여겨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친정엄마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하며 내가 잘되기를 응원하고 바랐던 이모였는데, 이름도 잊었다. 목소리와 억양도 예전 그대로이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거시기’라는 추임새를 넣는 걸 보면 분명 우리 이모가 맞는데, 묻는 말에는 반응이 없고 이상한 말만 하니 다른 사람 같았다. 정신이 아픈 이모가 못내 안쓰러웠다.
성한 사람 모시는 것도 힘든데 그런 이모를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돌보는 조카 또한 안쓰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에 걸리면 본인만 행복하고 주위사람은 힘들다더니 정말 그랬다.
친척들은 어쩌다 한번 다녀가면 그만이지만, 함께 사는 조카의 고통은 줄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지 정신 줄을 놓는 건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는 총명하고 열정적이던 이모의 삶을 여러모로 바꿔 놓았다. 그나마 착한 치매가 와서 입에 달고 살던 욕은 완전히 잊어버렸고, 원망과 화도 가라앉았다. 가끔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토닥이면 금방 꼬리를 내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이모는 하나뿐인 가지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니 이모의 근심 지수는 몇 배로 높아졌다. 생기지 않은 일까지 끌어다 걱정하는 편이어서 자신을 볶기도 했다. 그랬던 삶이 버거웠는지 이모는 치매라는 옷을 갈아입은 후 근심 보따리를 다 내려놓은 듯했다.
무덤에나 들어가야 잊힐 근심들이 절로 사라진 것이다. 좋은 기억만 남겼는지 표정도 밝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직은 배변도 스스로 해결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 시작된 치매는 서서히 이모의 기억을 지우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벽에 걸린 남편 사진을 보며 저분은 누구시냐고 묻기에 이르렀다.
이모는 평생을 함께 살았던 이모부와 아들을 지우고, 유년의 어느 날로 돌아간 듯 보였다. 기억 언저리 어디선가 친정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뒷마당에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가 쑥을 캐는 등 몸이 기억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왜 캐는지를 잊었다는 거다. 놀러가면 쑥개떡을 잔뜩 만들어서 여행 가방 하나 가득 싸주곤 했던 이모가 쑥의 사용처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너무 슬펐다.
여전히 쑥을 따고 거실에 늘어놓는 게 귀찮아서 화를 낼 법도 한데, 조카는 정글이 되어가는 뒤뜰을 밀어 버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할머니 놀이터라고.
이모는 공군 조종사였던 이모부를 만나 위스컨신주에 뿌리를 내렸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에 미국으로 시집와 언어와 문화 차이로 힘들게 살았다.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 믿고 태평양을 건넜으니 말이다.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에 모든 고통과 책임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세월이 흘러 살만해지니 이모가 의지했던 사람들이 돌아가시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온 동서에게 살갑게 영어를 가르쳐 주며 의지가 되어주었던 형님, 친구, 남편, 교우들. 거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2020년 4월에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로 발이 묶여 오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이모가 치매에 걸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었다. 외아들의 죽음을 알았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모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모른 채 아흔 다섯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올여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딸과 LA에 사는 조카가 동행해주었다. 생기지 않은 일을 끌어다 걱정하는 병이 전염되었는지 이러다 이모가 돌아가시면 자주 찾아 뵙지 못한 게 얼마나 후회될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비행기표를 끊었다.
1시간 40분이면 가는 그 길이 왜 그리도 멀었던 걸까. 이모가 평생을 살아온 밀워키에서 이모를 만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이모가 쉬지 않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먹은 게 전부였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루 앞도 알 수 없는 날들을 흘러간다. 남은 날들이 이모에게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곳을 떠나왔다. 오늘이라도 기억이 돌아와서 전화를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모의 잔소리가 못내 그립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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