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소담 한꼬집’ ] 뭇별이 된 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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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통틀어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아는 작가는 몇이나 될까?
학교 교육을 통해 알았든, 작품집을 통해 알았든, 만남을 통해 알았든, 경로에 상관없이 타계한 작가와 현존하는 작가를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는 있는지, 작가와 작품집이 연결은 되는지, 된다면 그 작품에 관해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의 현주소가 불현듯 물음표로 다가왔다.
읽고 쓰는 걸 좋아하던 아이에서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접하며 살았다. 문학을 전공했고, 책이 늘 곁에 있었으므로 웬만한 작가는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다. 나의 망년우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한마디 했을 거다. ‘지랄도 풍년’이라고. ‘웬만하다’라는 기준도 내가 만든 잣대이니 명품은 루이비통, 샤넬이 전부인 줄 알았다는 것과 딱히 다를 바 없다. 긴 얘기 짧게 하자면 아직도 못 읽은 책이 너무 많고, 모르는 작가는 더 많다는 거다.
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승묵 시인이라는 분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지날 뻔하였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전 선생님의 부친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의 시 중에서 「돌멩이」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수업이 끝난 후 구글에 검색해 보았으나 그 시는 찾지 못했다. 부친의 존함을 듣게 된 건 한참 후였다.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그분을 모른다는 게 얼마나 죄송하던지 왠지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으로 검색하니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분의 시를 모으고, 시판 중인 시집을 사고, 절판된 시집을 보유하고 있는 중고책방을 찾아서 마침 한국 방문 중인 선생님께 알려드렸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의 시집을 구하게 된 그분은 기뻐하며 고마워하셨다. 아버지가 남긴 시집을 소장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 아마도 부친을 만난 것 같았을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내게도 시집을 보내주셨다. 1977년 9월 20일에 한일출판사에서 출간한 『밑불』이라는 시집이었다. 46년의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온 책을 받아 들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빛바랜 시집의 첫 장을 넘기니 “백XX 님, 77년 9월 저자 드림”이라고 쓴 저자의 필적이 남아 있었다. 책을 판 그분이 누구신지는 몰라도 고마웠다. 그분이 팔지 않았다면 내게 올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책에도 인연 같은 게 있어서 결국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것 같다.
마침내 시집을 읽게 되었다. 시인은 서문에서 “시인이 아니라도 읽을 수 있는 시, 주제가 정직한 시, 숨어서 타는 밑불의 온기이기를 나는 늘 염원한다.”라고 밝혔다. 전승묵 시인은 1922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년 배달원의 노래」로 당선했다. 1975년 첫 시집 『배역 없는 무대』를 출간한 후 4권의 시집과 1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으며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한 문인이었다.
그분의 자료를 찾다가 오정희 소설가의 인터뷰 글에서 전승묵 시인을 언급한 부분을 읽게 되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데, 그분이 재직했던 학교와 시기가 맞는 것 같다. 국어 시간에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들켰는데, 겉표지를 보신 전승묵 선생님이 “헤세의 소설은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하고 지나치셨다는 짧은 일화였다. 공부시간에 딴짓한 제자를 나무라지 않고 혹여 작품을 오해(誤解)할까 봐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자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돌아가시면 흔히들 별이 졌다고 표현한다. 그분의 시집 속에는 시인의 우주가 들어있었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의 생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책장을 덮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는 것도 좋지만, 별이 된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분의 작품과 삶을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 선생님이 부친의 산장을 다녀온 날의 추억을 수필로 쓰셨다. 아버지가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생가를 방치하지 말고 문학관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언 드렸다. 자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만 그러면 좋을 것 같다.
종이를 꺼내 기억나는 작가의 이름을 적어 보았다. 처음엔 시인, 소설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등으로 나누어 신나게 적다가 나중엔 가물가물하여 접어버렸다. 건망증은 있어도 치매는 아니어서 말뭉치 중 하나만 잡히면 줄줄 끌려 나오기도 하고, 어떤 건 영 생각이 안 나서 난관에 빠진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게임처럼 끙끙거리기도 하지만, 그럴 땐 네이버가 효자 노릇을 해주니 괜찮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작가가 존재하고 또 존재했었다. 몰랐던 작가를 알아가는 것은 텍사스의 어느 버려진 땅에서 유전을 발견한 것만큼이나 내겐 행복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우리가 사는 지구 어디에선가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다가 하늘의 별이 된 작가의 이름을 찾아내어 불러 주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듬고 빛내 주고 알려볼 생각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들어주고 그들이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 함께 시간여행을 하며 곱게 나이 들고 싶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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