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제임스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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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의 수도 리치먼드의 사람들은 리치먼드가 날씨도 좋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자랑한다.
멀지 않은 곳에 산이 있고 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고 바다가 두 시간 거리에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느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습기가 전혀 없는 시애틀의 쾌적한 여름을 경험한 나는 끈적끈적한 그곳의 여름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캐스케이드산맥이나 캐나디안 로키 산맥을 따라 있는 베이커산이나 레니어산 같은 험하고 아름다운 서부의 산들을 보았던 나에겐 이곳 산은 조그만 언덕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호수와 바다가 도심에 있는 도시 시애틀에 살다 보니 리치먼드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을 못 봐서 그래….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리치먼드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경치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던 최 교수님과 권 교수님 그리고 테니스회에서 운동을 같이하던 사람들, 한인회 행사에서 봉사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교회에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 형이라고 또 동생이라고 부르는 친구들, 이들은 나에게 리치먼드가 정말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리치먼드에 사는 교포들 가운데 재주가 많고 성품도 맑은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이런 분들이 리치먼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사는 사람이 좋으면 사는 곳도 아름다워 보인다. 리치먼드도 아름다운 곳이 많다. 특히 도심 가운데로 흐르는 제임스 강이 매력적이라고 하고 싶다.
강 남쪽에 집이 있던 나는 남북을 가르는 제임스 강을 매일 건너서 강북에 있는 직장에 다녔다.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바다로 향해 흐르는 강을 좋아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에드거 앨런 포> 문학관, 미술 박물관과 함께 가장 자주 가던 곳이 강변에 있는 공원 <포니패스쳐>.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여울져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난 긴 오솔길을 걸으면서 나는 시를 생각했고 소설을 구상했다. 어느 계절에 가도 강물은 나를 반겨주었고 마음이 아플 때는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외진 바위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시인들의 시가 저절로 떠오르는데 마음이 아플 때 자주 외우던 시가 이해인 수녀님의 시 <강>이다.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의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입니다.
<포니패스쳐>에서 보면 강 건너편에 기찻길이 있고 가끔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기적을 울리며 지나는 기차를 보면서 한적한 한국의 시골 역을 떠올렸고 허수경 시인의 <기차는 간다>를 읊조렸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밤꽃도 없는 그곳에서 이런 시를 생각한 것이 기적 소리가 너무 처량하게 들려서 만이었을까?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보이던 바위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르르 우르르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강은교 시인의 절창 <우리가 물이 되어>를 소리 내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누구와 다투기라도 한 날 강가에서 이런 시를 소리 내어 읊으면 쌓인 미움이 조금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듯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리치먼드를 떠나기 전 이삿짐 싸는 일이 무척 힘들었을 때 제임스 강가에 가서 끄적거린 졸시 <이사 가는 날>을 소개한다.
이 짐 싸면 마지막일까/ 작은 짐 줄이고 또 줄이는/ 네 이마 위 땀방울/
그 속에 작은 나/ 내 속에 더 작아진/ 너//
사는 건 가볍게 떠날/ 이삿짐 꾸리기/ 추억도/ 욕망도/
무거운 사랑까지/ 버려야 남은 짐/ 짊어질 만할까?//
버려지는 것들에게/ 미안해/
너는 자꾸 상자 끈만/ 만지작만지작//
내가 너의/ 무거운 짐이 아니었니?
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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