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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딥페이크의 시대, 진짜가 더 의심받는다는 슬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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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연출인지조차 모르게 된 사회에 대하여 –
우리는 지금,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워지는 기묘한 시대에 서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오래된 격언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오히려 “보는대로 믿지 마라”가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직접 찍은 현실 영상과 AI가 만든 가짜 영상이 겉보기에 거의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면 속 등장인물이 나와 대화를 하고, 웃고, 심지어 사랑고백까지 해도 그것이 진짜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정교한 알고리즘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다.
기술이 가능성을 넘어서 위협이 될 때
딥페이크 기술은 본래 영화·엔터테인먼트·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손에 기술이 들어오면, 그것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후자의 그림자가 더 빠르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딥페이크와 목소리 복제 기술이 결합하면서 ‘로맨스 스캠’은 이제 사기의 최첨단 종합예술이 되었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주워온 사진 몇 장과 번역기 돌린 메시지 몇 줄로도 사람들을 속였다면, 이제는 상대방의 얼굴을 움직이고 표정을 만들고 음성까지 교묘하게 합성해, 영상통화조차 진짜처럼 꾸밀 수 있다. 피해자들은 상대가 정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기울고, 지갑은 빠르게 열린다.
최근 달라스에서는 70대 한인 여성이 온라인에서 알게 된 상대에게 20만 달러를 보낸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가 어떤 방식으로 사기를 당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결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20만불이라는 그녀의 전재산을 송금하고 나서야 그것이 ‘로맨스 스캠’인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제 보여지는 장면, 그러나 본인은 ‘아니다’
최근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는 또다른 유형의 영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장경태 국회의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주장이 담긴 고소장이 경찰에 접수되고 이어서 관련된 영상이 공개되며 논란이 발생했다. 영상을 본 거의 모든 사람은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술자리였고, 여자 보좌진은 취해 있었고, 장경태 의원은 그녀의 바로옆에 앉아 있는 영상이다. 또 그 여자 보좌진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장경태 의원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공개된 동의 없는 촬영 영상은 사실과 다른 명백한 무고”라고 주장한다. 물론 무고 여부나 범죄 성립 여부는 법과 수사기관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장경태 의원의 발언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 동의없는 촬영 영상은 사실과 다른 명백한 무고”
동의하지 않은 영상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건 사실과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것은 거짓이고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차라리 조작된 영상이라고 이야기했더라면 ‘그래 요즘 워낙 AI기술이 좋아졌으니까’라며 위안이라도 삼겠다. 하지만 영상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없이 그저 무고를 주장하고 있다.
‘진짜 영상’ vs ‘가짜 영상’
과거에는 영상이 나오면 많은 것이 끝났다. “증거가 있다”는 말은 곧 진실의 무게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영상이 공개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저게 진짜인가?”
“딥페이크인가?”
누군가가 억울한 피해를 당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진짜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딥페이크다”라고 외치며 면죄부를 얻으려 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구의 말도 쉽게 믿을 수 없고, 무엇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공간만 남는다. 이처럼 ‘진짜 영상’과 ‘가짜 영상’이 같은 무게의 의심을 받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진실이 가짜처럼 취급되는 역설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이제 우리는 ‘사실’보다 ‘서사’에 더 쉽게 흔들린다. 눈앞에 증거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편의 서사에 더 적합한지에 따라 믿고 안 믿고가 갈린다.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믿음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딥페이크가 만드는 가장 무서운 결과는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아니라, “진짜조차 가짜 취급당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이제 영상은 증거가 아니라 참고자료 정도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음성? 그것 또한 얼마든지 복제될 수 있다. 사진? 이미 오래전에 조작 가능성을 잃었다. 결국 남는 것은 인간의 눈, 귀, 감정도 아닌, 복잡한 검증 절차와 기술적 분석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만든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기술에 의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런 시대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에 피로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저건 잘못이다”라고 말하려 해도, 상대가 “가짜다”라고 외치면 모든 논쟁은 공중에 붕 떠버린다. 피해자는 피해를 증명하기 어려워지고, 가해자는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갖게 된다. 결국 책임은 흐려지고, 신뢰는 무너지고, 진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자리를 잃게 된다.
딥페이크의 시대는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아마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가짜가 진짜처럼 활보하고, 진짜가 가짜 취급받는 이 씁쓸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결국 다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은 진짜일까?’
이 물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큰 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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