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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백경혜] 김치병에 담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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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1,370회 작성일 25-04-18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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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혜 수필가
백경혜 수필가

  가게에 물건이 들어와서 며칠간 바빴다.


  오랜만에 들여온 거라 양도 많았고 바뀐 계절에 맞춰 디스플레이도 손봐야 해서 할 일이 많았다. 페덱스 아저씨가 커다란 종이 박스 여러 개를 작은 가게에 쌓아놓고 갔다. 목장갑을 끼면서 박스를 쓱 훑어보았다. 십 년 전부터 거래해 온 운송 회사 차장님은 작은 공간도 남기지 않고 알차고 야무지게 물건을 채워 보낸다. 네모난 모서리가 둥글어질 만큼 뚱뚱한 박스의 배를 커터 칼로 가르니 내 자식 같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건 뭉치들은 여러 겹의 검정비닐에 싸여있고 하나하나가 제법 무거워서 요령껏 들어올려야 한다. 뭉치 몇 개를 꺼내고 난 빈 박스는 복도로 끌고 가서 접착용 셀로판테이프가 붙은 부분을 베고 납작하게 접어 구석에 쌓아두었다. 항공 운송용 박스라 두툼하고 무겁다. 물건을 들어 올려 꺼내고 박스를 정리하는 건 만만찮은 일이지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꺼내놓은 물건에 달려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물건 정리 삼매경에 빠졌다. 삼매경-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그야말로 문자 그대로다.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배가 고픈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도 잊을 때가 많다. 물건을 세어 종류별로 선반에 올리고 손님을 상대하고 새 물건도 진열하다가 빈속이 아우성치면 그제야 시계를 들여다보곤 한다. 


  다른 일에도 비슷해서 해결할 문제가 생기면 딴생각을 잘 못한다. 나의 이런 면은 전투 중인 백혈구와 비슷하다. 백혈구는 침입한 바이러스, 곰팡이 같은 병원체를 찾아내 공격하고 먹어버린다. 한번 싸웠던 병원체를 기억해서 똑같은 놈이 들어오면 더 빠르고 강하게 대응한다. 허구한 날 “지금 공격하자!” 또는 “이제 진정하자!” 같은 신호를 보내며 사는 녀석인 것이다. 단세포 같은 나도 일에 매달려 초집중한다. 재발하는 일에 재빠르게 대응하지만, 생경한 일에는 패닉이 되기도 한다. 사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밀려오는 문제들을 처리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타국에서 안 되는 언어로 쩔쩔매며 사니까 더 사나운 백혈구가 되었을 것이다. 혼자 힘으로 안 될 때는 영어 잘하는 자식에게 부탁 해놓고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독촉할 때가 많다. 아이들은 자주 “괜찮아.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라 말한다. 일이 다 해결될 때까지 전전긍긍 끙끙대는 엄마가 자식을 꽤나 귀찮게 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가 그렇게 질주하는 나를 잠시 멈춰 서게 했다. 친구는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수줍게 웃으며 내민 가방 안에는 작은 플라스틱병에 담긴 김치가 있었다. 평소에 음식을 잘 안 해 먹는 친구에게서 그런 선물을 받은 게 의외였지만, 모처럼 담근 김치를 나눠 먹고 싶었나보다 하고 고맙게 들고 왔다. 김치가 김치냉장고 안에서 맛있게 발효되고 평소처럼 할 일을 하나씩 해치우던 어느 날 다시 만난 친구가 놀라운 말을 했다. 어느 마트에 갔더니 큰 배추들 사이에 조그마한 배추 하나가 눈에 띄더란다. 그 배추를 보니 내가 떠올랐고 그걸로 김치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많은 배추로 담근 김치 중 일부를 나눠준 게 아니었다. 배추 한 포기만 사서 한 사람을 위해 담근 특별한 선물이었다. 

  

  무어라 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는데, 말없이 눈만 껌뻑였다. 그 정성을 떠올렸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친구는 김치를 담그는 동안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솜씨가 좋아서도 아니고 익숙한 일도 아니었지만, 주고 싶은 마음으로 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변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 친구는 말로 때우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기쁘다면 사랑하는 것이다. 돌려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진짜다. 사랑은 정말 주는 것인 모양이다. 전쟁같이 산다 해도, 기껏 나와 내 가족 일에만 열심을 내는 나에게 친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도 돌아보며 살라고 말없이 가르쳐 주었다.

  

  근래에 끊었던 라면을 일부러 다시 샀다. 하루 종일 물건을 정리하느라 허기진 심신을 달래려 라면을 끓였다. 사실 친구 김치가 먹고 싶었다. 김치는 역시 라면과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계란까지 하나 풀어 넣은 라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김치병을 열었다. 몇 번 안 담가봤다는 말이 무색하게 김치는 정말 깨끗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서툰 솜씨로 두툼하게 썰린 무채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김치는 눈물 나게 맛있었다. 오래오래 아껴먹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밀려드는 문제들을 상대하느라 앞만 바라보며 살지만, 뒷꼭지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문제들에 붙들려 살지 마. 그건 아이들 말처럼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대신 네 친구처럼 가끔 주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봐. 말로 때우지 말고, 국밥 한 그릇, 커피 한 잔이라도 사며 그들과 함께해. 그게 배운 대로 사는 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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