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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혜자의 세상 엿보기] 가을로 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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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326회 작성일 23-11-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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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백에서 두 칸짜리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베셍폴( Baie Saint Paul) 이라는 마을로 갔다. 예전에 증기기관차가 내는 뿌우웅 소리를 내며 달리는데, 기차 안 풍경은 한국과 좀 다르지만, 어린시절에 탔던 완행열차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학만 되면 오빠와 함께 순천에서 광주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국민학교 2학년때 처음 타본 기차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걷지 않고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보채는 아이를 업고 기차를 타는 시골아낙들,  교복을 입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타는 칸으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난끼 가득한 남학생들과  초여름의 청보리밭, 밀레의 만종 같은 가을 들판이 그곳에는 늘 있었다.

경부선 기차도 하동역을 지날 때면 ‘재첩국 사이소’란 외침이 새벽부터 들렸고, 진주역은 역사만 보아도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죽은 논개가 생각났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작은 역들을 수도 없이 지나면 부산이 나왔는데, 요즘이야 다들 자가용이 있어,  입맛 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80년대 까지는 기차가 아주 중요한 여행 수단이었던 것 같다. 

물론 고속버스도 있지만, 기차가 주는 낭만은 결코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엔 유독 열차와 관련된 대중가요나 ( 대전부르스, 남행열차, 춘천 가는 기차 등등)  영화, 시, 소설 등이 많은 편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로 시작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고,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도 역시 기차역이다. 

안나의 사랑은 기차역에서 시작되었고, 비극적인 결말도 또한 그곳에서 일어났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은 또 어떠한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주인공이 기차안에서 본 휴양지 니가타현에 관한 첫인상인데, 소설의 줄거리가 당장 궁금해지게 만드는 희대의 명문장임에 틀림이 없다.

기차를 타며 나는 왼쪽 창가에 앉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오른쪽은 캐나다와 미국 국경사이를 흐르는 세인트 로렌스 강이 주로 보였지만, 반대편은 크고 작은 언덕위나 산 위에 , 작은 집 울타리에, 기차와 맞닿을 것 같은 암벽과 폭포 사이에 있는 붉은 단풍을 계속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퀘백 단풍 여행은 도깨비 촬영지를 간다는 흥미가 더 해져 한인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난 퀘백주가 주는 쁘띠 프랑스적인 요소가 더 매력 있었다.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개척한 도시들은 확실히 그들 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퀘백과 몬트리올에 있는 고딕양식의 아름다운 성당들과 유럽의 성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들, 풍미가 느껴지는 음식, 불어만 고집만 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관광객 대부분이 미국이나 타국에서 왔는데, 뮤지엄이나 관광지 소개나 팻말이 불어로만 표시 되어있는 것은 좀 아쉬웠다. 

추상화를 감상하는데 제목을 알 수가 없고 화장실 역시 불어를 모르면 헷갈리기 십상이어서 어떤 여자분은 남성용화장실로 잘못 들어가기도 했다.

베셍폴은 퀘백주에서 예술인마을로 조성해 놓은 작은 동네이다. 커피를 파는 카페와 갤러리가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줄지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언니와 함께 커피를 마카롱과 곁들어 마셨는데, 마치 가을의 대학로 카페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길어서 텍사스에서는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없었는데 이곳은 어딜 가나 가을이 물들어 있었다. 

메이플나무가 곳곳에 서 있던 와이너리와  날씨가 흐려서 단풍 비경을  놓치긴 했지만, 오랜만에 타본 몽트랑 블랑의 케이블카, 쁘띠 상플랑 거리에서 먹었던 치즈와 그래비소스가 잔뜩 뿌려진 푸틴이라는 캐나다식 프렌치 프라이, 성요셉 성당에서 바라본 몬트리올 시내 전경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날엔 랍스터 디너가 나왔는데 무엇보다 식당 분위기가 좋았다. 전직 가수였다는 뉴저지에서 온 가이드가 섹소폰 주자의 연주에 맞추어 마이웨이를 불렀고, 흥이 난 나이 지긋한 연주자는 우리들이 신청한 곡을 모두 연주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드라마 <도깨비> 주제곡도 있었다. 

코리언 손님들의 취향을 배려한 곡이어서 팁이 많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단체 여행이어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일정도 알차고 숙식도 좋았다. 무엇보다 랜덤으로 함께 가게 된 일행분들이 다 재밌고 좋으셔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이제 조금 있으면 가을 기차역에서 내려야 할 때가 온다. 부디 아프지 마시고 겨울로 건너가시기를 빈다.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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