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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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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322회 작성일 26-01-2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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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호수로 가는 길가의 도토리 나무엔 빈 둥지, 빈 도토리 깎지, 빈 가지… 온통 빈 것뿐이다. 


  나무 아래 쌓인 도토리 열매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뚫어 놓은 구멍들이 확연히 보인다. 어미는 그 속에 알을 낳은 후 가지를 입으로 잘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열매 속에서 부화한 새끼가 도토리 양분을 먹고 땅속에서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지극한 모성이다. 나뭇잎째 가지를 자르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을까. 미물들의 생존법이 경이롭다.  


  나무도 휴지기가 있어야 또 다른 새해를 맞을 수 있다. 죽은 듯 보이는 나무가 거북이 등 같은 거칠거칠한 수피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특하고 장하다. 매년 같아 보이지만, 나름대로 오래된 외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고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거다. 그래서 기대된다. 


  겨우살이가 제철을 만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남의 집에 버젓이 살림을 차리더니, 어느새 영롱한 열매로 겨울새를 유혹한다. 겨울 나목에 그토록 싱그러운 연둣빛이라니, 축축 늘어진 모양새가 부잣집 샹들리에 같다. 겨우살이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혼자서는 설 수 없어서 남의 가지에 몸을 얹고 겨울을 난다. 그 사실을 안 후부터 겨울이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겨우살이가 반갑기도 하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심정이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 살기 위해 어딘 가에 기대야 하는 신세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민자로 살아오며 나 역시 수많은 겨울을 건넜다. 겉보기엔 잘 사는 듯 보였겠지만, 어딘 가에 기대야 서 있는 게 가능했다. 언어에, 제도에, 누군가의 친절에, 가난한 문학에. 나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실은 나목에 얹힌 겨우살이처럼 위태롭게 견디며 산 세월이 더 길었던 거다.


  겨우살이는 겨울에 열매를 맺는다. 새를 부르기 위해서다. 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계절 뒤로 미루지 않는다는 점이 부럽다. 나는 종종 ‘조금만 더 지나면’, ‘이 시기만 잘 넘기면’ 하며 삶을 유예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겨우살이는 그런 핑계를 모르는 존재다. 겨우살이를 기생이라 부른다. 정확하게는 남의 나무줄기에서 수액을 빨아먹고 사는 반기생 식물이다. 기대어 산다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혼자 서진 못하지만, 살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니까. 문득 기생이라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어쩌다 보니 나도 기대야 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우뚝 서야만 당당한 거라고 말했던 건, 하루 앞도 모르는 자의 오만이었다. 


  새해가 되어도 가라앉았던 기분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꽤 오래갔다. 건강상의 이유든 다른 이유든,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이 컸다. 결실의 계절에 거둘 것 없는 농부의 마음처럼 허무하고 실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 보니 시작은 SNS였다. 지인의 대부분이 작가다 보니 상 받고, 출간하고, 출판기념회하고, 우수도서에 선정되는 등 자신의 성과를 알리는 게시물이 연말에 오르내렸다. 시간이 갈수록 나만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감정이 나를 주저앉혔다. 

  모든 나무가 잎을 버리고 침묵할 때, 겨우살이는 자신을 드러낸다. 숨기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 솔직하고 당당한 초록이 싫지 않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삶을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모처럼 하늘이 쨍하다. 나목은 말이 없고, 그 위에 얹힌 겨우살이 열매는 눈부시다. 그 어느 것도 내 잣대로 재거나 판단하지 말아야지.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해야지. 모두 그렇게 힘든 시기를 근근이 버티며 건너가고 있으니까. 


  우리 집 무궁화나무가 곱고 여린 잎새를 피워냈다. 조금만 따뜻하면 봄인 줄 알고 철없이 얼굴을 내민다. 주말에 기온이 떨어져서 눈이 올지 모른다는데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오늘 피고 내일 얼어 죽더라도 밀어붙이는 그 깡이 부럽다. 


  마음을 다잡았다. 닫혔던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으니 힘내라고. 여기는 끝이 아니라 다시 서는 출발선이라고. 아무쪼록 새해에는 얼어붙은 경기가 풀리고, 구멍 난 주머니가 메워지고, 마른 땅에 풀이 돋고, 급속 냉동된 관계가 완화되어서 도토리나무에 새순이 오를 때 즈음엔 다 편해졌으면 좋겠다. 백마든, 청마든, 적마든, 아니 조랑말이어도 좋으니, 목적지를 향해 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방향을 정하니 마음은 이미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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