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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운현궁의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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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24회 작성일 25-11-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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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교수님과 안국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이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인데, 규모가 작으니 둘러보고 가라고 권해주셨다. 서울에 있는 궁궐은 다 가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운현궁이 빠져있었다. 한국에 살 때 그 앞을 수없이 지나갔음에도 비껴갔던 거다. 그제야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이 떠올랐다. 


  2025년 늦가을, 오랜 세월 나를 기다려 준 듯한 운현궁과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궁의 첫인상은 고즈넉하고 편안했다. 늦가을 햇빛이 기와지붕 위에 내려앉아 화사했고, 담장 너머 은행잎은 나비처럼 흩날렸다. 단풍이 든 나무들과 어우러진 전각은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왕조는 저물어도 운현궁은 역사의 결을 품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운현궁 마당 가운데서 흥겨운 북소리가 들려왔다. 김길선류진도북놀이협회 주관으로 열린‘김길선 선생 10주기 헌정 공연’이 한창이었다. 서서 보는 관객이 많아서 공연자들의 머리만 보였다. 앞쪽으로 가보니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관객과 공연하는 모습이 보였다. 운 좋게 한 분이 자리를 떠나서 맨 앞에 앉아 영남성주시신풀이, 박희정 하애정 2인 북놀이, 김병천의 북놀이, 윤중임류설장구 공연, 김선미 외 8인 북 공연, 난장 북놀이 등 전국에서 온 고수들의 신명 나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흰 저고리에 흰 바지, 그 위에 형형색색의 조끼와 끈으로 장식한 연주자들의 연주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들의 눈짓과 몸짓이 악기와 하나 되어 흥을 표정으로 터뜨리며 장단의 흐름을 이끌었다. 원을 이루어 선 연주자들은 서로의 눈빛을 읽으며 움직였고, 북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천들이 동시에 흔들려 하나의 생명체가 움직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북소리, 장구 소리와 함께 연주한 태평소 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소리는 봄에 떠난 매화를 다시 불러와 그곳을 밝혀주는 듯했다. 그들은 단순한 공연자가 아니라, 몸으로 전통을 새롭게 빚어내는 사람들이었다. 


  공연을 보며 방방곡곡에서 묵묵히 전통을 지켜온 분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얼마나 갈고 닦아야 그런 표정으로 연주할 수 있을까. 고집스럽게 한길을 걸으며 북을 놓지 않았던 그분들의 세월이 존경스러웠다. 전통은 저절로 생기지도 남지도 않는다.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뵌 적은 없지만 고 김길선 선생이 그러했고, 그날 신명 나는 북놀이를 보여주신 김병천 선생이 훗날 그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공연의 감동은 단지 추모에만 있지 않았다. 누구 하나 가볍게 전할 수 없는 전통의 무게가 소리로, 몸짓으로, 숨으로 살아 움직이며 관객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 장단은 단순한 리듬이 아니라 스승을 부르는 목소리였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궁을 천천히 걸었다. 노락당, 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노안당, 정자인 노락정과 안채 역할을 했던 이로당, 궁을 지키던 수직사까지 전각들이 크진 않았지만, 역사의 밀도는 작지 않았다. 유물전시관에서 운현궁의 주인이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보았다. 푸른 먹빛이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래된 그림임에도 눈동자는 선명했고, 관복의 문양은 희미해졌지만 위엄있어 보였다. 공연의 장단이 벽과 기둥을 타고 되돌아오는 듯했다. 교수님 덕분에 흥선대원군과 그가 머물던 집, 당대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궁을 나와 인사동에 들어섰다. 거리에는 외국인들이 가득했고, 전통 공예품 사이에 인기몰이했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현)’의 굿즈들이 많이 보였다. 갓을 쓴 캐릭터 인형, 도깨비 문양의 열쇠고리, 전통 문양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부채와 액세서리 등 종류가 다양했다. 외국인들은 가방에 갓 쓴 인형을 달아보며 사진을 찍고, 서로에게 캐릭터 이름을 알려주며 즐거워했다. 운현궁에서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인사동에서는 전통이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변주된 모습을 목격한 셈이다. 


  며칠 전, 쇼핑몰에서 농심이 마련한 케데현 팝업스토어를 보았다. 농심 신라면과 새우깡이 층층이 쌓여 있고, 포장지마다 케데현 캐릭터들이 인쇄돼 있었다. 외국인들이 신라면 봉지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거나, 새우깡 포장을 뒤집어보며 캐릭터 이름을 맞히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신라면은 해외에서 인기 많은 한국 라면이다. 작은 도시의 주유소에서도 신라면을 팔 정도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매운맛을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신라면이 케데현과 손을 잡자, 라면 한 봉지조차 K컬처의 플랫폼이 되었다. 우리의 전통이 세계에서 유행이 되었다. 영화 촬영지를 보고 굿즈를 사기 위해 먼 나라에서 관광객이 날아오는 세상이 되었다. 


  운현궁의 북소리와 케데현의 세계적 인기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중심에는 같은 진실이 있다. 우리 것을 지켜온 사람이 있었고, 우리 것을 새롭게 펼친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이 만든 길 위에서 전통은 계속 살아간다는 거다. 아무쪼록 우리 문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잘 지키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그날 공연은 늦가을의 길목에서 피어난 작은 봄 같았다. 아마도 스승은 제자들을 칭찬하며 환한 얼굴로 천국에서 북채를 잡았을 것이다. 그날의 소리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불씨가 되길 바라며 국악의 미래를 응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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