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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몸과 화해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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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713회 작성일 25-11-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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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코피가 터졌다. 몸이 보낸 긴급 신호였다. 여전히 삼십 대인 줄 알고 몸을 몰아붙이는 날들이 많았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 주 1회 두 시간 반의 변화 속에서 터진 코피였다. 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코피가 터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몸은 나보다 훨씬 정직하고, 거짓말을 모른다는 것을.


  “몸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입니다.” 운동 선생님의 말씀은 단순한 진단이 아니라, 경구 警句처럼 들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숨 쉬는 법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쉴 틈 없이 달리느라 걷는 법조차 잊고 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네 해 전 잠깐 했던 동작들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 몸은, 나보다 나를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몸의 중심은 약간 앞으로 하고 팔의 힘을 뺍니다. 어깨를 힘껏 들었다가 내립니다. 백 번 반복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팔이 저렸다. 팔꿈치는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가고, 손가락은 뻗치다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그 순간 나는 참 우스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꼭 마리오네트 인형 같았다. 줄이 끊긴 듯 허우적대는 팔, 동시에 온 힘으로 버티는 어깨. “어깨는 인제 그만 쓰고, 날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그 말이 묘하게 가슴을 쳤다. 평생 내 몸을 가지고 살았으면서, 정작 그 사용법 하나 몰랐던 것이다.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 살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억지로 짊어지고, 참아내고, 버티느라 날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의자처럼 무릎을 기역 자로 접습니다. 턱은 당기고, 정수리를 위로 최대한 끌어올립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배가 홀쭉해질 때까지 내쉽니다. 발가락을 쫙 펴고 뒤꿈치는 서로 닿을 듯이 안으로 당겨줍니다. 이때 무릎은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지발가락에, 새끼발가락에 차례로 힘을 줍니다.” 3분, 4분, 5분. 온몸이 달아오르고, 잔근육들이 깨어나 항의한다. “우리를 잊지 말라.”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떨어질 때, 나는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바닥 전체로 서세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린다. 평생 발가락은 나에게 아무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그 작은 열 개의 발가락이 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마당 건너편에서는 새 집들이 올라가고 있다.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우는 그 소리가 요즘의 나와 닮았다. 무엇을 세우려면, 먼저 바닥이 단단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문득 발가락을 내려다본다. 이토록 오랜 세월을 살면서, 열 개 발가락을 정성껏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발톱을 자를 때나 잠깐 스치듯 지나갔을 뿐이다. 나이가 들면 발가락이 오므라든다고 했다. 그건 단지 발가락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닫히고 굳어지는 건, 마음도 같다.


  묵은 고집은 몸에도 있다. 굳은 골반, 닫힌 어깨, 경직된 허리. 그걸 하나씩 풀어내면, 마음이 먼저 환해진다. 정지하는 법을 알아야, 비로소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 숨을 참고 버텨내는 동작보다, 숨을 다 내쉬고 펼치는 동작이 훨씬 넓고 아름답다. 살면서도 그렇다. 힘을 빼야 더 멀리 간다. 육십 년 동안 내 몸은 나를 만나 참 고생했다. 매일 불려 나오고, 혹사당하고, 그래도 묵묵히 내 삶을 떠받쳤다. 이제는 그 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다. “미안해, 그동안 너무 몰랐어.” 저질 체력은 없다. 다만 생각이 미리 한계를 그어놓았을 뿐이다. ‘나는 원래 이 정도야’라는 선을 지우면, 몸은 의외로 넉넉해진다.


  요즘 나는 내 몸과 연애 중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기 좀 뻐근해요.” “그래, 그랬구나.” 그렇게 말을 걸고, 다독인다. 숨을 깊게 뱉고 어깨를 낮추면 마음속의 응어리도 함께 풀린다. 몸이 편해지면, 삶이 고요해진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말을 건네며, 걷고 서고 앉는 자세에도 예의를 지키려 한다. 운동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내 몸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 그것이 곧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숨은 근육을 찾아내는 일은 아프지만, 기쁘다. 그건 오래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몸은 곧 인생이다. 큰 근육만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작은 근육들이 함께 일어설 때


삶은 훨씬 다정해진다. 이제 가을이다.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이 가을은 아마 내 몸이 새로 태어나는 계절이 될 것이다. 운동 덕분에, 내 안의 낙엽이 물들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살아온 세월 동안 나는 늘 꽉 차게 살려고 애썼다. 이제는 ‘쉬는 법’을 배우려 한다. 그게 나의 두 번째 인생 공부다. 몸이 먼저 가르쳐준다.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다시 걸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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