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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글향, 독자의 영혼에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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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54회 작성일 25-10-0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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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기조는 ‘미국 우선주의’였다. 오랜 세월 미국이 감당해온 무역적자의 해법으로 고율 관세 정책을 내놓았고, 2025년 1월 20일 취임식과 동시에 트럼프는 관세 부과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 순간부터 내게도 태평양을 건너오던 따뜻한 손길이 하나둘 끊기기 시작했다. 6월에 출간된 한솔문학 여름호를 발송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달이 지나도록 책이 닿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으나, 괜스레 부정탈까 싶어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관세로 인해 반송되는 우편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불안했는데, 마침내 책이 무사히 도착했을 때의 안도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한솔문학11호. 박스를 열자마자 훅 끼쳐왔던 냄새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인쇄소의 잉크 향, 새 종이의 풋풋한 냄새 너머로 묘하게 익숙한 그리움이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마치 오래 떠나 있던 고향의 흙냄새 같기도 했고, 수천 킬로미터의 파도를 넘어오며 스며든 바다의 비릿한 숨결 같기도 했다. 이 책은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작가들의 오랜 산고産苦와 출판인의 간절한 기다림, 그리고 대양을 건너온 시간과 공간의 깊이가 응축된 귀하디귀한 결실이었다.


  책 한 권이 태어나기까지의 길은 바다의 항해와도 닮아 있다. 문장은 때로 파도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이내 부서져 사라지고, 다시 다듬어진 문장은 마치 갈매기의 울음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수없이 고쳐 쓴 문장들은 물개가 파도 위에 잠시 몸을 드러냈다 이내 물결 속으로 사라지듯 스러졌고, 영감의 한순간은 날치처럼 어둠을 뚫고 흩날리는 별빛이 되기도 한다. 번개 같은 직관은 칠흑 같은 침묵 속을 찢으나, 곧 몰려온 풍랑 같은 회의와 자기 부정은 글을 쓰는 영혼을 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다시 자판을 두드리고, 마침내 고통과 기다림 끝에 피어난 문장은 황홀한 노을처럼 빛이 되어 원고를 채운다. 이 모든 과정이야말로 작가들이 자기 영혼의 즙을 짜내듯 글을 써 내려온 노고였고, 그 산고가 태평양의 항해와 겹쳐져 한 권의 책으로 도착한 것이다.


  남편과 함께 책을 펼쳐놓고 오랜만에 와인 잔을 부딪히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막판까지 의견이 엇갈려 표지 결정에 애를 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뜻을 이어받는 일은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분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기에, 작은 결정 하나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결국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씨앗이 땅속에서 어둠을 뚫고 싹을 틔우듯, 포도 한 알이 수확되어 으깨지고, 차가운 저장고의 긴 침묵을 견딘 뒤에야 빈티지 와인으로 완성되듯, 한 권의 책도 기다림과 고통 속에서 비로소 제 향기를 품는다. 와인이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미완의 상태로 잠들어 있듯, 책 또한 독자의 손에 닿아 첫 장이 펼쳐지는 순간에야 ‘읽힘’이라는 발효를 시작한다.


  이제 이 책은 내 손을 떠나 독자에게로 향했다. 나는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와인이 잔 속에서 고유의 향을 피워내듯, 이 책 또한 닿는 독자의 손길마다, 눈길마다 각기 다른 맛과 향으로 살아나기를. 누군가에게는 진득한 탄닌처럼 쌉싸름하고 묵직한 사유의 여운을 남기고, 또 누군가에게는 맑은 화이트 와인처럼 경쾌하고 산뜻한 감동을 선사하기를. 그리하여 이 문학의 맛과 향이 독자의 영혼 깊숙이 깃들어, 삶의 고독한 순간마다 오래도록 숙성될 가치 있는 울림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학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문과 창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창으로 햇살이 스며들기도 하고, 바람과 감동이 찾아들기도 하며,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밖에서 안을 살피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한밤의 신음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단단한 벽에 틈을 내기도 하고, 한 줄기 문장이 꽃처럼 피어나 여름에도 눈을 내리게 하기도 한다. 문학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일이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떠드는 와중에도 불현듯 혼자가 되게 하고, 소소한 일상이 한순간 소풍으로 바뀌며, 작고 허름한 둥지에서도 따뜻한 향기를 맡게 하는 일.


  책 발송을 마치고 난 뒤, 서가에 쌓여 있던 책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텅 빈 고요함이 남았다. 그 고요 속에서 지난 몇 달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원고 의뢰서를 조심스레 보내고, 과연 마감일에 맞춰 빠짐없이 원고가 도착할지 마음 졸이던 순간들. 하나둘 도착한 원고를 정리하며 따뜻해졌던 시간들. 원고와 함께 후원금을 보내주신 작가님들, 격려의 말씀으로 나를 세워주신 선생님들의 넉넉한 품을 떠올리던 순간들. 그리고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온 한솔문학11호의 단단한 무게. 그 모든 것이 이 책의 귀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태평양의 바다 향과 파도 소리, 그리고 작가들의 고뇌와 산고가 녹아든 이 책은 독자의 영혼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나는 그 여정을 축복하며, 다시금 다음 호를 위한 묵묵한 고행의 길을 준비한다. 문학은 늘 고향처럼 기다리고, 바다처럼 숨 쉬며, 영혼의 빈틈마다 향기를 채워 넣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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