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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허망과 희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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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320회 작성일 25-09-27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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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호숫가를 거닐다 돌아오는 데, 잔디밭과 보도블록 틈새에 종이가 꽂혀 있었다. 반으로 접힌 모양새가 지폐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에 뒤척이던 종이가 속을 열어 보였다. 온기가 사라진 파워볼 복권이었다. 당첨되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았을 텐데, 버려진 걸 보니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누가 버렸는지, 어디서 날아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이 추레했다. 쓰임을 잃은 순간 외면당하는 건 사람이나 종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공돈을 못 주워서는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집 아줌마가 차고 앞에 세워 둔 차에 허겁지겁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었다. 우리를 보자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복권을 사러 간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달떠있었다. 그녀는 필리핀계 이민자다. 동네가 형성되던 십여 년 전,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와 살았으니,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다. 허허벌판에 집들이 하나둘 늘고, 옆집에 아시아 사람이 들어오니 더없이 반가웠다. 우리는 오랜 세월 음식을 나누고, 꽃씨를 나누고, 집을 비울 때면 우편물을 맡아주는 이웃사촌으로 정을 쌓아왔다. 요즘은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모난 세월을 함께 건너는 중이다.



 집에 들어선 딸이 남편에게 복권 이야기를 했다. 거실에서 뒹굴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추첨이 세 시간밖에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겠다며 차 키를 챙겼다. 그는 착한 사람이 번호를 골라야 붙는다고 굳세게 믿는다. 처음엔 내게 선택권을 주었는데, 신통치 않았는지 어느 순간 딸에게 임무가 넘어갔다.


  남편은 매주 복권을 산다. 뭔가에 홀려 더 사는 날도 있었지만, 보통 한 장을 산다. 붙을 놈은 한 장만 사도 붙는다면서 자기만의 철학을 고수한다. 당첨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복권을 손에 쥔 순간만큼은 그에게도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 보였다. 소액이 당첨된 적은 있지만, 잭팟의 행운은 늘 그의 곁을 비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복권을 산다. 로또 한 장에 희망을 걸고 수시로 주문을 외워보는 거다. 붙으면 한 방에 고생 끝이라며 너스레도 떤다. 정말 그런지 지켜볼 참이다.


  나는 ‘한방 주의’보다 성실한 걸음걸음이 좋다. 당첨 뒤에 삶이 무너지는 사례를 방송에서 보아왔다. 갑자기 생긴 큰돈은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복권을 사는 한, 내 삶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나도 복권을 산 적 있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힘겹게 살던 지인을 돕고 싶어서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다카(DACA) 제도를 시행했던 시기였다. 일정 비용을 내고 절차만 밟으면 아이들이 합법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지인은 영주권 사기로 가진 돈을 모두 잃었다. 도와주고 싶은데, 나 역시 가난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복권을 샀다. 혹시라도 당첨되는 기적이 온다면, 지인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 주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꽝이었다. 허망은 떨어진 복권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나의 빈 주머니와 무력한 마음에서 온다는 걸 그날 깨달았다. 쓰린 기억은 쓴 추억을 남긴다.


 텍사스 복권에는 “Thanks for supporting Texas Education and Veterans”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텍사스 복권 수익금은 주 교육기금과 참전용사 지원에도 쓰인다고 하니, 결과와 상관없이 의미 있는 기부를 한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복권은 ‘희망을 사는 행위’이자 ‘자발적 세금’이라고 말한다. 희망을 사려고 돈을 썼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으니, 전적으로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애써 떨어진 마음을 위로하고 합리화해 보는 거 아닐까.


  미국 동부 시간으로 밤 10시 59분에 파워볼 추첨을 시작한다. 숫자가 하나하나 뽑힐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발!’을 외치며 보고 있을까. 긴장감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 2불짜리 복권 한 장에 희망을 건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애잔하다. 그 간절함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주까지 사람들을 긴장케 하던 파워볼 잭팟이 드디어 터졌다. 텍사스와 미주리에서 복권을 산 두 사람이 당첨금을 나누어 가졌다. ‘$1.787 billion’이면 ‘0’이 대체 몇 개나 붙은 걸까, 한국 돈으론 환산하면 ‘0’은 더 많을 것이다.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무관한 상금에 공이 몇 개인지가 왜 궁금한 걸까. 잭팟 당첨금은 빌리언에서 밀리언 단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서민에겐 여전히 큰돈이다. 남편은 이번 주에도 복권을 사러 갈 거라고 했다. 한 배를 탔으니, 허망과 희망 사이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복권의 진정한 행복은 살 때 있는 듯하다. 복권을 손에 쥐고 당첨의 순간을 상상하며 척박한 세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잊고 아주 잠깐이지만,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희망의 무게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의 씨앗을 품고 산다. 복권보다 더 확실한 희망은 무엇일까. 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허망과 희망 사이를 걷는 존재다.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옆집 아줌마가 준 자색 고구마 찰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 그 무형의 잭팟이야말로 진짜 잭팟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당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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