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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백경혜] 육개장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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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1,625회 작성일 25-02-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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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혜 수필가
백경혜 수필가

  아버지 1주기가 다가온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때아닌 따스한 햇살이 우리 가족의 등을 토닥여주던 날, 가족묘 큰아버지 곁에 아버지를 모셔다드리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삼 년간 거동이 불편했지만, 주간보호센터에도 다니며 그럭저럭 지내셨는데 목욕탕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지면서부터 자리보전을 하셨고 삼 개월간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며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던 아버지가 서울까지 내려오게 된 여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난했을 아버지는 갖은 고생을 하며 학교에 다니고 군대를 마친 후 어렵사리 가정을 꾸리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엄격하셨다. 그 인생을 세세히 알지 못해도, 가족 부양하는 틈틈이 삶을 즐기다 가셨다는 건 알고 있다. 젊어서는 주말마다 낚시하러 다녔고, 운신이 어려워 지기 전까지도 즐거운 일을 찾으며 친구와 어울려 산에 다니셨다. 


  보행 보조기를 밀고 다니며 집에만 계실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잘 보살펴 드렸다. 몇 년 전 한국에 들어가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가 맛깔스러운 반찬 여럿을 밥상에 올린 것을 보고 장난삼아 “아버지는 내가 와서 좋겠다. 내 덕분에 이런 진수성찬을 받으니까 좀 더 자주 올까요?” 했더니 “으흥! 너 없어도 나는 원래 매일 이렇게 먹고 사는데…” 하셨더랬다. 젊어서는 친구들과 그렇게 밖으로만 돌아다니더니 늙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다고 어머니가 지청구를 주어도 되레 큰소리치며 당당하셨다. 거동이 어려워진 남편을 돌보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돌아가시기 삼 개월 전, 누워계신 아버지를 팔순 노모가 일으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매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달파 하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지를 장지로 모시던 날, 나와 언니와 동생의 가족은 어머니를 모시고 상조회사에서 준비한 버스에 올랐다. 장지로 향하는 길에서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여윈 얼굴로 숨 가빠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 가슴 어디쯤 걸려있었을 것이다. 장지까지 가는 길이 멀어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조카가 무인 단말기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돈가스,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유부 국수… 가게 창구 위에 주문 번호가 뜰 때마다 동생이 음식을 날라왔다. 마침내 모두 주문한 음식을 받았는데, 주인 없는 음식이 하나 남아있었다. 우리 것이 아닌가 하여 영수증의 주문 번호를 확인해도 우리 음식이 맞았다. 주인 없이 남은 음식은 육개장이었다.


  조카는 그것을 주문한 적이 없다며 육개장이 메뉴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젊고 똑똑한 조카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필 육개장이라니. 사흘 내내 장례식장에서 먹었던 것을 한 번 더 먹고 싶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먹고 싶어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주인 없는 그 육개장을 바라보았다. 조카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시켰나 봐!”

 아버지가 이제라도 육개장 한 그릇을 드시게 되었다면 분명 기쁜 일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아버지가 고사리와 쇠고기를 건져 드시고 남은 국물을 들이켜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우리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누워있게 되니 근육이 퇴화했고 음식도 점점 잘 삼키지 못하셨다. 폐렴으로 병원에 거듭 입원했지만, 심각한 질병은 없어서 “아픈 데가 하나도 없는데, 왜 병원에 있는 거냐?”며 퇴원을 재촉했어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적은 양의 음식도 거의 드시지 못했다. 

어쩌면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계셨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추모하고, 손님을 맞고, 육개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함께 버스에 올라 우리를 바라보셨을지도 모른다. 승화원에서 내어준 따뜻한 분골 용기를 받아 든 장남을,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채 버스 등받이에 기대앉은 두 딸의 얼굴을, 지아비를 잃고 망연히 앉아 있는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를 오래오래 바라보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토록 드시고 싶던 뜨끈한 육개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셨을 것이다. 

 

  가족 납골묘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봉안한 후 고개 숙여 아버지의 안식을 빌었다. 몇 줄기 바람이 머리카락을 만지고 지나갔다. 며칠이 지난 뒤 형부가 말했다. 우리가 머리 숙여 영면을 기원할 때 봉분 위로 밝은 빛줄기가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과묵하고 지혜로워 평소에도 가족이 의지하는 우리 형부는 평안히 하늘로 오르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나 보다. 

 

  나는 믿는다. 참혹하게 여윈 그 마지막 모습을 두고두고 애달파 할 우리를 위해 아버지가 손수 육개장을 시키셨다고. 그리고 “나 이렇게 한 그릇 자알 먹고 간다.” 위로하며 새처럼 가볍게 떠나신 거라고. 


  언젠가 내가 떠나가는 날에 나를 마중 나오신 아버지를 만나면 웃으며 그날 일을 꼭 여쭈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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