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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떠난 후에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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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3,158회 작성일 23-07-2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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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집 지붕 공사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한 시간만 자려고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잠결에 꺼버렸나 보다. 그 소리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보통 때는 쪽잠을 자도 오 분 간격으로 알람을 설정해 놓는데, 오늘은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지게 피곤했거나 일어날 수 있다고 굳세게 믿었던 모양이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세수하고 모자를 썼는데, 거울을 보니 사자가 따로 없었다. 

고데기로 뻗친 머리카락을 펴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씻는 게 나을 것 같아서 3분짜리 샤워를 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자동차 키를 챙기고 신발을 신으려다가 허둥지둥 지나왔던 동선을 따라 되돌아갔다.

몸만 빠져나간 침대, 뱀 허물처럼 바닥에 남은 옷, 싱크대 위에 늘어진 젖은 수건, 코드를 뽑지 않은 고대기, 목욕탕 거울에 사방팔방 튄 물, 뚜껑 열린 로션, 욕실 바닥에 솔잎처럼 깔린 긴 머리카락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빛의 속도로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어질렀으니 치우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처럼 바쁜 날은 다녀와서 치워도 되련만, 유난을 떠니 깔끔도 병인 양하여 짜증이 올라왔다. 

외출할 때 집안을 치우고 나가는 습관은 친정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사람이 집을 나갔다가 영원히 못 돌아올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남 부끄럽지 않게 치우며 살아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시던 말씀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땐 왜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당겨 걱정하실까 하는 생각에 잔소리로만 들렸다.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분이셨다. 특히 외출할 때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방 청소를 하고, 부엌을 치우고, 빨래를 주물러 널고,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셨다. 

해가 길었던 여름날, 복통으로 입원했던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마흔여덟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에 쓸 사진이 필요해 열흘 만에 갔는데, 집이 얼마나 깨끗하던지… 너무나 깨끗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깨달았다. 사람이 집을 나갔다가 영원히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외출하기 전에 왜 집을 치워야 하는지를.

결혼하고 보니 남편도 만만치 않았다. 나도 깔끔한 편인데 남편은 더 깔끔했다. 그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산다. 

딸에겐 잔소리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보고 배운 대로 자라겠지 했는데, 딸내미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 숲이 영 사라지지 않았다. 

좋은 본을 보고 자라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가더니 달라졌다.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깔끔해졌다. 같이 쓰는 공간을 청소하지 않는다고 흉보는 걸 보니 잔소리 안 하길 잘한 것 같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읽다가 숙연해졌다. 죽은 사람의 집을 청소하고 유품을 정리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인데, 사람이 죽고 난 후 남은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몹시 슬프게 다가왔다. 죽기 전까지 읽었던 책, 음식, 메모 등이 전하는 메시지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는지를 대변해주었다. 

어떤 분은 자살 직전에 사용했던 도구를 가정용 분리수거 함에 나누어 넣고 떠난 분도 계셨다. 

자기가 떠난 후 자기 방을 치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외출하기 전에 흐트러진 옷가지와 머리카락을 줍는 마음처럼 말이다. 하루 앞도 모르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떠난 후 남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라는 책 속의 한 문장이 아프게 와 박혔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한 노숙자를 보았다. 여행객들이 활보하는 관광지 한 구석에 주린 배를 움켜잡고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돈을 주면 빵이 아닌 마약을 산다고 주지 말라는 지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땀에 젖은 어깨를 흔들어 밥값을 드렸다. 

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갓 브레스 유”라고 했다. “반사” 나는 그 말을 바로 돌려주었다. 

하늘이 내게 주는 축복이 있다면 그분께 나눠드리고 싶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가난을 구제할 길은 없다. 

하지만 힘든 이를 만났을 때 밥 한끼 나누는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인사 한마디, 밥 한끼가 희망이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오늘은 화씨 108도였다. 체감온도는 더 높았을 것이다.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이 뜨거운 날 지붕을 고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그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뉴스를 보니 폭우, 산사태, 폭염 등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 늘고 있다. 내 주변에 어려운 이웃은 없는지 한 번쯤 돌아보고 마음을 내어주는 7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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