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추억은 그루브를 타고 온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5-08-23 00:51

본문

 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오랜만에 전축을 열고 비틀즈 판을 올렸다. 야전이라고 불리던 야외용 미니 전축인데, 바늘이 LP판을 긁으며 흘러나오는 소리가 정겹다. 요즘 음원의 깔끔한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약간의 잡음, 떨림, 그리고 의도치 않은 미세한 숨소리 같은 울림이 주는 편안함이 좋아서 이따금 듣곤 한다. 추억의 노래는 또 다른 추억을 불러온다. 삶의 궤적은 언젠가 이야기가 되어 풀려나오는 모양이다. 


  늦가을 오후, 안국동 거리는 한산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더니 바람이 차가워졌다. 체감온도는 예보보다 낮게 느껴졌다. 아픈 허리가 먼저 반응했다. 언제 비가 다녀가셨는지 도로 한쪽 고인 물 위로 낙엽이 떠 있었다. 서로 부딪히며 둥글게 맴도는 모습이 마치 시간 속에 갇힌 추억 같아 눈길이 머물렀다.

  지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내게 장소 선택권을 주었다. 두 번도 생각지 않고 안국동을 골랐다. 서울길이 낯설어 보통 호텔 근처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 카페는 꼭 다시 가보고 싶었다. 매일 다니는 동네 길도 ‘공사 중’ 표지판이 붙어있으면 어디로 우회할지 몰라 헤매는 길치가 무슨 배짱으로 바운드리를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앞서면 종종 아픈 사람이라는 걸 잊는다. 전철역 옆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갔는데, 아니었다. 네이버 지도 앱 없었다면 헤맬 뻔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 조명이 켜 있는데도 어둡게 느껴졌다. ‘암순응’이라고 했던가. 환한 곳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형태가 드러나는 눈의 반응 말이다. 그 시간을 참아내는 게 아직도 익숙지 않아서 안달을 떤다. 차츰 사물이 드러나고, 음악이 들려왔다  

  그곳은 온 벽이 전축판으로 빼곡한 술집 겸 카페다. 전에 갔을 때 전축판에 홀렸는지 자꾸 생각이 났다. 이번엔 가까이 가서 보았다. 세워진 재킷의 등을 손으로 훑으며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눈에 익은 판이 제법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빛 바랜 재킷을 들여다보는 순간, 오래전 내가 일했던 공간이 떠올랐다.


  1983년, 종로 3가에 오비광장이라는 음악감상실 겸 호프집이 있었다. 누구나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곳이어서 손님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DJ로 일했다. 손님이 많은 저녁시간엔 주로 고참들이 음악을 틀었고, 학생은 6시 전에 일했다. 투명한 유리 박스 안에서 손님들이 신청한 곡을 틀어주고 그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일이 즐거웠다. 사랑, 고백, 청혼, 생일, 이별의 아픔을 함께하며 음악으로 축하하고 위로할 수 있어 감사했다. 

  바늘이 그루브를 타고 돌 때마다, 누군가의 마음이 얹혔다. 그래서 어떤 음악은 전축판에 패인 골처럼 마음판에 새겨졌을 것이다. DJ가 일하는 유리 박스 안은 좁았지만, 그 공간에서 만들어 내는 에너지와 파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길었다. DJ는 단순히 음악을 트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을 재생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손님이 있다. 매주 장애가 있는 아내를 안고 와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신청하던 남자가 있었다. 맥주와 돈가스를 나누며 서로를 챙기던 그 부부를 보며 결혼을 꿈꾸곤 했다. 이따금 들러 응원해 주셨던 교수님, 명함을 건네며 찾아오라던 대기업 간부, 노래 대신 고백을 빼곡히 적어 준 학생, 휴가 나온 군인, 이층에서 내 옆모습을 스케치해 준 미대생도 있었다. 

  손님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알바생들이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직원들이 배려해 주셔서 잘 할 수 있었다. 음악이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유리 박스 안에서 그들과 함께 소통했던 DJ로서의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닌 가 싶다. 그 시절은 흘러갔지만. 음악은 아직도 곁에 남아 나와 더불어 늙어가는 중이다.  


  술집 사장님이 음악을 틀어주었다. 멘트는 하지 않았지만, 판을 고르고 만지고 바늘을 옮기는 손끝이 야무졌다. 그녀도 젊은 날 DJ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다. 손님의 자리에서 듣는 음악은 같은 곡인데 느낌이 달랐다. 자리가 다르면 무게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신청곡을 쓰려다 말았다. 그녀가 고른 음악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나의 묵은 이야기를 들어주며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 함께 웃어주던 지인이 있어 따뜻했던 하루였다. 

  추억은 늙지 않는다. 가슴에 품은 추억 하나가 나를 세우고 붙잡아주기도 한다. 오늘은 DJ가 되어 비틀즈의 ‘Yesterday’를 들려주고 싶다. 

  유리 박스 너머, 나의 모든 그리움에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오랜만에 전축을 열고 비틀즈 판을 올렸다. 야전이라고 불리던 야외용 미니 전축인데, 바늘이 LP판을 긁으며 흘러나오는 소리가 정겹다. 요즘 음원의 깔끔한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약간의 잡음, 떨림, 그리고 의도치 않은 미세한 숨소리 같은 울림이 주는 편…
    문학 2025-08-23 
    고대진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
    문학 2025-08-16 
    요즘은 그야말로 여행자 천국의 시대이다. 시간이 되고, 경비를 충당할 수만 있다면,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도, 여행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여행을 할 수가 있다. 가까이에 있는 주변도시부터 다른 주, 다른나라에 대한 여행이 보편…
    문학 2025-08-09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또다시 눈을 떴다. 창밖에선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한국과의 시차는 열네 시간. 밤낮이 바뀌어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거듭되는 소음에 뒤척이다 그냥 일어나 앉았다.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한밤중이건만 요란하게 경광등…
    문학 2025-08-01 
    아스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설레임에 풍성한 여행계획과 여행의 만족을 기대 하면서 특히 록키 산속의 아름다운 뮤직텐트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흥분감에 긴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창가로 끝없이 펼…
    문학 2025-07-26 
    “속이 다 시원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간 것 같아!” 밤늦은 퇴근이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불을 켜고 뒤란으로 나갔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참아왔던 날이 드디어 오늘이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뒤란 정원을 깨끗이 뒤엎어 버렸다. 능소화가 한창이었지만, 정원에 퍼…
    문학 2025-07-26 
    지난 독립기념일, 텍사스 중부 힐 컨트리 지역에 국지성 폭우가 쏟아졌다. 5일 새벽 과달루페강(Guadalupe River) 수위가 45분 만에 26피트가량 상승하면서 강물이 범람하여 큰 홍수로 이어졌다. 이번 재해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커 카운티(Kerr Cou…
    문학 2025-07-19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lt…
    문학 2025-07-12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노르웨이지언 크루즈를 타며, 나는 우리나라도 비로소 국제 크루즈시대가 열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껏 크루즈들이 거쳐간 수 많은 항구중 우리나라 항구는 한 곳도 없어, 아쉬웠는데, 한류에 힘입어, 드디어 인천이 국제 크루즈 출발지가 된 것이다. 크…
    문학 2025-07-04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타지 생활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했던 아들이 이 길 끝에서 어떤 위안을 얻길 바랐다. 졸업식에 맞춰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 며칠을 내어 스모키 마운틴으로 향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자, 모퉁이를 돌 때마다 …
    문학 2025-06-27 
    감격이란,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할 때 찾아오는 강렬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가깝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것, 눈에 보이지만 손에 넣기 어려운 순간. 특히 스포츠에는 신기록과 우승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감격의 순간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제23…
    문학 2025-06-21 
    지난 5일, 이지원 선생님이 “미주복음방송, 통일의 소리”라는 코너에 남편과 함께 출연해서 우리 책을 소개했다며 단체카톡방에 링크를 올렸다. 궁금해서 ‘바로 듣기’를 클릭했다. 군더더기 없는 화법으로 얼마나 야무지게 말을 잘하시던지, 엄마 미소를 지으며 경청하였다. 2…
    문학 2025-06-13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
    문학 2025-06-07 
    뇌우를 동반한 소낙비가 아침 내내 격렬하게 내렸다.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한 장자의 철학 우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와 페퍼민트 차를 가지고 패티오로 나갔다. 작정한 듯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비에, 마음을 빼앗겨, 책은 눈에 들…
    문학 2025-05-31 
    가게에 소녀 손님 둘이 들어왔다. 남미계 십 대 청소년으로 보였다.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와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한국이라 하니 저희끼리 마주 보며 ‘역시!’ 하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느 도시냐고 묻길래 서울이라 하니 두 손으…
    문학 2025-05-2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