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백경혜] 친애하는 우리의 스타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265회 작성일 25-05-24 05:51

본문

백경혜 수필가
백경혜 수필가

  가게에 소녀 손님 둘이 들어왔다.

  남미계 십 대 청소년으로 보였다.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와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한국이라 하니 저희끼리 마주 보며 ‘역시!’ 하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느 도시냐고 묻길래 서울이라 하니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기뻐했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나도 같이 웃었다. 한국 문화가 좋아 나까지 친근하게 느껴지나 보다. 

  요새는 한국말로 인사하는 손님이 부쩍 늘었고 제법 소통이 될 만큼 실력을 갖춘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말을 어찌 아냐고 물으면 대개는 K-pop과 K-drama를 통해 배우게 됐다고 한다. 드라마 내용을 신나게 설명도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이라 고개만 끄덕끄덕한다. 그들은 청춘이고 나는 먹고살기 바쁜 중년인 것이다. 

  한국 음식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 동네 한국 식당엔 외국 손님이 더 많다. 놀랍게도 그들은 거의 모두 젓가락으로 식사한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내가 미국을 배우는 사이 그들은 한국을 배우고 있다. 


  나도 그 소녀들같이 외국 문화에 열광했던 때가 있었다. ‘딥 퍼플 (Deep Purple)’과 ‘레인보우 (Rainbow)’ 같은 록 밴드를 좋아했는데, 그중에 영국 그룹 ‘퀸 (Queen)’은 나에게 우상이었다. 고등학생이던 언니가 종일 듣던 노래가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였다. 그 노래는 아카펠라로 시작하여 발라드로 바뀌었다가 오페라틱 코러스가 이어지고 절정을 지나면 하드 록이 펼쳐졌다. 

  “아, 정신 사나워 못 듣겠네.” 시끄러우니 카세트를 꺼달라고 불평했지만, 언니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하지만 내 귀는 이상한 그 노래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나 보다. 며칠 만에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mama mia, mama mia, let me go…” 

  노래는 질리지 않았고 묘하게 마음을 휘감았다. 결국 나는 ‘퀸’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틈만 나면 ‘퀸’ 노래를 흥얼거렸고 ‘퀸’ 이야기를 했다. 멤버 네 사람은 모두 작곡자이자 뛰어난 연주가였고 퍼포먼스도 훌륭했다. 그들은 유럽의 낯선 청년이 아니라 내 곁에서 숨 쉬는 아이돌이었다. 언젠가 영국에 가서 그들의 공연을 눈앞에서 보고, 어쩌면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 결혼 할 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얘기지만, 무모한 꿈도 꾸는 것이 청춘이리라. 


  1991년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소식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에게 시집간다는 소망은 영원한 농담으로 머물게 되었다. 직장 일로 해외를 다닐 때 런던과 뉴욕에 가면 레코드 가게에 들러 퀸 CD를 사 모으는 것이 쏠쏠한 재미였다. 지금도 가끔 그 CD들을 쓰다듬으며 나의 아이돌에게 조용히 경의를 표한다. 지금 살아있다면 70대 노인이겠지만, 그가 무대에 오른다면 나는 틀림없이 영국행 비행기표를 샀을 것이다. 그 기막힌 라이브 공연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Bohemian Rhapsody」를 들으면 누런색 다이얼 전화기가 생각난다. 그 전화기 앞에서 짝사랑 오빠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던 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I want to break free」와 「Save me」를 매일 흥얼거렸던 고3 때 교실이 떠오르기도 한다. 「Love of my life」를 열정적으로 따라 불렀던 중학생 단발머리 내 모습도 소환된다. ‘퀸’은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2018년 개봉한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 「Bohemian Rhapsody」를 우리 동네 AMC에서 관람했을 때, 라이브 장면마다 관객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극장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함께 노래할 땐 진짜 무대 앞에 앉은 듯 가슴이 벅차 왔다. 관객들은 세월을 뛰어넘고 있었다. 대부분 나 같이 주름진 중년이 되었고 더러는 대머리 아저씨가 되었지만, 우리는 ‘퀸’을 사랑했던 소년, 소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스타를 가지는 것은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옛 스타는 캡슐에 싸여 마음속 자판기 같은 곳에 보관된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무심히 눌린 버튼에 그 캡슐이 굴러 나오면 우리는 그 시절 스타와 어린 나를 함께 만나게 된다. 그날의 소리를 듣고, 그때의 풍경을 보게 된다. 심장이 펄펄 뛰던 청춘의 광경은 이젠 색이 바래 더 아름답다. 

  우리 가게에 들러서 K-pop 스타일의 멋진 양말을 사 가는 십 대 아이들은 어떤 추억을 만들고 있을까. 나는 카세트테이프로 외국 스타를 만났지만, 요즘은 영상으로 전 세계 셀럽들을 만나니 눈과 귀가 수집한 정보는 더 큼직한 추억 캡슐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아마도 BTS와 뉴진스(NewJeans) 같은 한국 스타들도 많은 이에게 그들의 젊은 날을 소환해 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자식이 나의 스타였던가.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워진 것 같다. 어머니는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열렬한 팬이다. 어머니에게도 아이돌이 있는 마당에 나도 분발해야겠다. 

  다시 가슴을 뛰게 해 줄 스타를 찾아봐야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뇌우를 동반한 소낙비가 아침 내내 격렬하게 내렸다.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한 장자의 철학 우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와 페퍼민트 차를 가지고 패티오로 나갔다. 작정한 듯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비에, 마음을 빼앗겨, 책은 눈에 들…
    문학 2025-05-31 
    가게에 소녀 손님 둘이 들어왔다. 남미계 십 대 청소년으로 보였다.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와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한국이라 하니 저희끼리 마주 보며 ‘역시!’ 하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느 도시냐고 묻길래 서울이라 하니 두 손으…
    문학 2025-05-24 
    우리가 사는 달라스는 참으로 행복한 도시입니다. 최근에 눈부시도록 발전하는 경제와 더불어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연주회와 전시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쿠르, 엘리자베스 피아노 콩쿠르, 쇼팽 피아노 콩쿠르 등과 더불어 세계 5대 피아노 콩쿠르…
    문학 2025-05-17 
    오월이 되면 눈이 자주 붓는다.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잦아진다. 안 좋은 일 때문은 아니다. 생일이 가까워지면서 그리운 얼굴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드라마 속 한 줄 대사에, 문득 눈시울…
    문학 2025-05-17 
    딸이 내게 ‘Pride & Prejudice’라는 영화를 아느냐고 물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건데, 방영 20주년을 맞아 4월 20일에 재개봉 한다며 핸드폰을 열어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오만과 편견’이었다.…
    문학 2025-05-10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
    문학 2025-05-03 
    -저는 이 십년만에 아틀란타 옷수선 가게를 접고 수원에 정착했어요, 무엇보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말 때문에 긴장 안 해도 되니 살 것 같네요.-부럽네요, 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역이민은 이왕 하려면 빨리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70 넘…
    문학 2025-05-01 
    가게에 물건이 들어와서 며칠간 바빴다. 오랜만에 들여온 거라 양도 많았고 바뀐 계절에 맞춰 디스플레이도 손봐야 해서 할 일이 많았다. 페덱스 아저씨가 커다란 종이 박스 여러 개를 작은 가게에 쌓아놓고 갔다. 목장갑을 끼면서 박스를 쓱 훑어보았다. 십 년 전부터 거래해…
    문학 2025-04-18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중얼거린다.“일어나기 싫다. 그냥 이대로… 잠들었으면.”늙어가는 이 나이에 학교 가기 싫어 꾀를 부리는 아이처럼 아직도 월요일 아침마다 이러고 있으니, 나도 참 이상한 아줌마다. 평생을 올빼미처럼 밤에 더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아왔으니 당연…
    문학 2025-04-11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
    문학 2025-03-28 
    삼월은 메두사의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신들의 질투를 받아 무서운 괴물이 되고 만 메두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온 만물을 소생케 하고, 생명의 푸른 빛으로 온 세상을 일 깨우지만, 한편으론 예상치 못한 March Madne…
    문학 2025-03-21 
    오전 다섯 시쯤 번쩍이는 섬광과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줄기 때문에 커튼을 젖히고 밖을 살피기도 무서웠다. 커튼을 살짝 들고 빼꼼히 내다본 풍경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작달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하늘은 천둥번개로 번쩍였다. 시멘트 바닥에 고…
    문학 2025-03-14 
    큰아이가 가족을 데리고 한국 처가에 다녀오는 동안, 기르던 애완견을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처음 제안이 나왔을 때 나는 선뜻 허락하지 못했다. 개를 키워본 적도 없고, 개와 가까이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애는 메이플을 맡아달라고 간절하게…
    문학 2025-03-07 
    미주경희사이버대학교동문회 임원방에서 우리도 유명 강사님들을 초청하여 줌강연회를 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동문은 물론이고,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도 들을 수 있도록 오픈 강의로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줌강연은 이미 여러 단체에서 하고 있지만, 동문의 화합과 결…
    문학 2025-02-28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
    문학 2025-02-2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