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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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내게 ‘Pride & Prejudice’라는 영화를 아느냐고 물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건데, 방영 20주년을 맞아 4월 20일에 재개봉 한다며 핸드폰을 열어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오만과 편견’이었다. 포스터가 바뀌긴 했지만, 거기엔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얼굴과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걸어오는 듯한 남주인공 다아시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보라색 배경에 검은색으로 인물을 표현하였는데 그 단순함에 마음이 설렜다. 그 질문이 얼마나 반갑던지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다며 힘주어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딸이 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책을 읽었다는 공통점이 무형의 자산처럼 느껴져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요즘은 한국문학에도 관심이 생겼는지 이미예, 황보름 작가의 영역 소설을 시립도서실에서 빌려오곤 한다. 바라기는 더 많은 한국 책이 번역되어 미국 학생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으로 물꼬를 텄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며 기쁨을 미리 당겨 웃어 보았다.
영화는 모름지기 극장에서 치즈 듬뿍 얹은 나초와 콜라를 마시며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제 맛인데, 몸이 아파 가지 못하고 소장본을 꺼내 안방극장에서 보았다. 같은 영화인데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키가 자라듯 영화를 이해하는 성장판도 함께 자라는 모양이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딸이 친구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그래서였을까, 영화 속 다섯자매의 결혼 문제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18세기 말, 영국의 롱본이란 시골에 사는 베넷 부부는 슬하에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 당시 사회는 여성들에게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던 부부는 친척인 콜린스와 둘째 딸 엘리자베스를 결혼시켜 재산과 가문을 지키고 싶었으나, 딸의 거절로 무산된다. 어느 날, 마을에 부유한 가문의 빙리라는 남자가 이사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베넷 부인은 큰딸 제인을 그와 맺어주고 싶어서 혈안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무도회에서 마주친 빙리의 친구 다아시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그가 언니와 빙리의 결혼을 방해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을 품게 된다.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오만 죄까지 얹어 청혼도 거절한다. 사랑 없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언니는 빙리와 결혼하게 되고, 다아시의 진심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오해를 풀고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제인 오스틴을 아끼는 팬들이 많았는지 개봉날은 하루에 한 번 상영했는데 몇일 지나지 않아 두 번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관심 없을 거라고 여겼던 생각은 오만이고 편견이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녀는 19세기 영국 사회의 계층적이고 성차별 적인 구조 속에서 여성의 자아 존중과 선택의 자유를 중심에 두고 작품을 썼다. 당시의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얻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선택은 외면당했다. 그녀는 『오만과 편견』 작중 인물인 엘리자베스를 통해 결혼이라는 중요한 결정 앞에서 외적인 조건이나 사회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존중하며 진정한 사랑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갈등을 통해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관계를 왜곡하는지 또한 비판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순한 것 같지만 명료한 메시지가 오랜 세월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오만’과 ‘편견’은 영화의 주요 갈등 요소이다. 오만은 다아시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집안과 지위가 자신보다 낮다고 여겼고, 그녀에게 결혼 의사를 물을 때도 자신이 속한 계층의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편견은 엘리자베스에게 있었다. 다아시의 냉정한 표정과 태도를 보며 오만한 인물로 단정 짓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품었다. 진심은 모르면서 판단한 자체가 편견이었다. 오만과 편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영국에서 스코틀랜드까지 문학기행을 한 적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생가와 관광지를 방문했고 그때 윈체스터 대성당(Winchester Cathedral) 안에 있는 제인 오스틴의 무덤을 보았다. 좋은 곳에 잠든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이름이 써진 벽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밟았을 땅을 밟고, 그녀가 바라보았을 하늘을 보고, 그녀가 맞았을 비를 맞으며 의미 있는 체험을 감사드렸다.
2025년은 제인 오스틴 탄생 250주년이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 미국에서는 2005년에 개봉했던 영화 ‘오만과 편견’ 20주년 기념 재개봉을 하며 그녀를 기렸다. 사람은 가도 명작은 남는다. 죽기 전에 그런 글 한 편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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