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알아두면 유용한 식품상식] 짜장면
페이지 정보
본문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오늘은 다른 음식들에 비해 조금 서민적 가격으로 언제 먹어도 맛있는 짜장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짜장면의 원조는 중국의 작장면(炸醬麵)으로서 산둥 지방에서 가정식으로 먹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장면은 장(醬)을 볶아서(灼) 면 위에 얹은 요리의 통칭으로서 삶은 면 위에 볶은 장을 고명처럼 얹어서 먹는 음식이어서 비빈다는 느낌보다는 얹어서 섞는다는 느낌이 강한 음식입니다.
한국에서 처음 짜장면을 먹기 시작한 건 임오군란 이후 화교들이 들어오면서 부터입니다. 1884년 인천에 청국조계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인들이 이주하여 이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 때 인천에서 가까운 산둥 지방에서 건너온 부두 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식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초라고 합니다. 당시 화교들의 공동체인 차이나타운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정식 청나라 음식 식당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길거리 음식으로 노동자들의 한 끼 식사였던 짜장면을 정식 청나라 요리집에서도 판매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식당은 중국 본토의 수타 요리사를 불러와 수타면 짜장을 판매하는 곳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900년대 이전에 이미 인천 차이나타운에서는 많은 중식 식당이 생겨 났고 짜장면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이와중에 1908년 문을 연, 짜장면의 원조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이라는 식당은 짜장면을 파는 여러 식당 중 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공화춘 식당이 유명해지면서 짜장면의 원조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현재는 짜장면이 공화춘 식당 이전부터 판매가 되었던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공화춘 식당은 작장면이라는 음식을 토착화시켜서 짜장면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판매한 식당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짜장면은 지금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공산화 등 당시 정치상황과 한국 정부의 중국인 무역 금지 정책에 놓인 화교는 우리나라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화교들이 본토로 돌아가거나 남아 있던 화교도 재산권 행사의 제약으로 큰 사업을 할 수가 없었기에 작은 식당을 열어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음식밖에 판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면종류 음식은 미국의 밀가루 지원과 저렴한 가격 때문에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었습니다. 이에 화교들은 한국산의 재료를 활용한 한국식 중화요리를 개발하게 되었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된 한국식 춘장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검은색 짜장면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의 짜장면은 갈색 춘장으로 만들어 갈색 짜장면이었다고 합니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 출신 화교 왕송산이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적갈색의 중국춘장에 캐러멜 색소와 감미료, 화학조미료를 첨가하여 검은색 사자표 춘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식 춘장의 개발은 짜장면 대중화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양파의 대량 재배와 한국식 춘장의 시판 그리고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이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짜장면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차이나타운 주변의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던 짜장면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달콤하고 구수한 맛과 더불어 저렴한 가격,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습니다. 빠른 조리법으로 인해 지금의 햄버거와 같이 일종의 패스트 푸드 음식처럼 변한 짜장면은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난 붐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지금의 짜장면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서민의 음식으로 대표되던 갈색의 짜장면이 어느덧 멀리 미국까지 날아와 외국인들의 테이블로 서빙되는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