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칼럼
[백경혜] 떠나갈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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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시간을 운전하여 내슈빌에 왔다.
댈러스에서 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670마일 달려온 이곳에서 아들을 만났다. 기숙사를 비워야 하는 방학 때마다 오는데, 어쩌다 두 아들이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어서 칠 년째 오가는 중이다. 가져올 짐이 많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오고 싶어서 온다. 울창한 숲 가운데로 고속도로가 나 있어서 긴 시간 운전도 할 만하다. 카페인 짱짱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볼륨을 한껏 높인 음악 속에 잠겨서 한적한 도로 위를 날아갈 듯 달리는 것에는 묘미가 있다. 드라이브하는 동안 나는 낯선 땅에서 애면글면 살아내느라 쪼그라든 가슴 깊은 곳에서 팔팔한 마음 한 움큼을 끄집어올린다. 그것을 생기나 패기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품 있고 활기찬 캠퍼스도 볼거리다. 시내에 있는 대학인데도 여름밤엔 수백 종의 나무들 사이로 반딧불이 떠다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캠퍼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쇼트 팬츠에 스니커즈를 신은 학생들과 섞여 앉아 있으면 안 나오던 글이 슬슬 풀리기도 한다. 젊음은 일종의 에너지인가 보다.
아들 방은 동굴 같았다. 책상 주변만 동그랗게 치웠고 주변으로 빨아야 할 옷가지며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그나마 다 먹은 음식 봉지와 투고 박스들은 치웠다는데, 여기서 건강하게 잘 있어 준 것만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불을 걷어 세탁하고 창틀의 먼지를 닦았다. 제출 기한이 임박해야 집중이 되어 느지막이 숙제를 시작하는데, 코딩이 안 풀릴 땐 며칠이고 하얗게 밤을 새웠다고 했다. 하여간 다 커서도 아슬아슬하게 군다. 책상 위엔 몬스터 인형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 속 캐릭터다. “얘네들이 널 지켜줬구나?” 하니 “응, 얘도…” 하며 모니터 아래 누워있는 또 다른 몬스터를 일으켜 앉혔다.
아들은 185센티가 넘는 키에 큰 체구다. 거구의 아들이 상상 속 몬스터에게 위안받으며 치열하게 공부하는 걸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몸이 자라는 속도를 마음이 따라잡지 못한 걸까. 온화한 성품의 작은아들은 햇볕에 널었다 들여온 솜이불 같아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아들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가 천천히 떠나도 나는 좋을 것 같다.
아들도 참 이쁘다. 꼬물거리는 입에 조그만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떠먹이고 잠 못 들어 칭얼거릴 땐 품에 안아 흔들며 자장가를 불러 재운 것은 아들이나 딸이나 마찬가지다. 잘 먹고 순조롭게 자라는지, 친구는 잘 사귀는지, 공부 안 하고 빈둥대지는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정성껏 키우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런데 다 자란 딸과 친한 엄마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면, 아들과 친한 엄마는 어쩐지 눈총을 받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서운하게 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마음을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다.”라고 충고한다. 그 아들에게 마마보이 프레임을 씌우기도 한다. 딸을 키웠어도 무척 친했을 터인데,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억울해도 별수 없다. 반은 맞는 얘기 같으니까. 큰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을 때 아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달라진 태도에 적응이 안 돼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섭섭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임을 결국엔 배우게 되었다. 여자아이였다면 비교적 유연하게 자기를 설명했을까. 아들이 딸보다 더 단호하고 확고하게 독립해 가는 건 사회적 요구와 남성 호르몬이 한몫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둥지가 좁아지면 다 자란 새는 둥지를 떠나야 하리라. 깃털을 단장하고 데이트를 나서는 새가 둥지까지 돌 볼 여유는 없을 것이다.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으니 이왕이면 훨훨 날아가 멋지게 자기를 어필하기 바란다. 부모를 떠나 독립된 사회의 일원이 된 자식은 정서적,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모와 자식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문제들을 스스로 극복해야만 강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것은 딸과 아들에게 예외가 없다.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아진 탓인지 요즘은 부모들도 많이 변했다. 자식만 바라보며 사는 엄마를 주변에선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홀어머니 사연 같은 건 이제 사라져가는 옛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아들 엄마에 대한 편견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 부모도 자식이 제때 떠나줘야 편하다. 모처럼 자유를 얻은 부모도 날개를 펼치고 멀리 날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속을 들여다보자. 팔딱거리는 열정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파이널 시험을 마치고 온 아들이 의자를 한껏 젖히고 앉아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다. 슬슬 기숙사 짐을 싸야 하지만, 좀 놀게 놔둔다. 작은아들도 여문 청년이 되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같은 둥지에서 살아온 정을 오롯이 나누고 싶다. 그리고 때가 되면 둘째도 기쁘게 떠나보낼 테다. 가끔은 숲속에 한데 모여 흥겹게 노닐기도 하겠지. 하지만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궤도를 쫓으며 행복을 지지해 줄 것이다.
내일도 에너지 드링크를 몇 모금 들이켜고, 두고 온 내 둥지를 향해 신나게 날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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