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증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에 전력망 ‘브레이크’ … 한국 에너지 기업에는 새로운 시장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텍사스 경제를 움직인 것은 석유와 천연가스였다.
지금은 인공지능(AI)이다. 오픈AI(OpenAI)·오라클(Oracle)·메타(Meta)·아마존웹서비스(AWS)·구글(Google)·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퉈 텍사스에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
문제는 이 AI 데이터센터들이 삼키는 막대한 전력이다. 데이터센터 한 곳이 대도시 하나에 맞먹는 전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결국 그렉 애벗(Greg Abbott) 텍사스 주지사는 지난 3일 신규 데이터센터의 전력망 접속을 일시 중단시키는 초강수를 꺼냈다.
AI 데이터센터가 텍사스로 몰리며 전력망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수요가 치솟자, 규제 당국에 전력·용수 사용량 전면 감사를 마칠 때까지 신규 접속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전력난이 한국 기업들에는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태양광에 이어 가스발전, 원전, 소형모듈원자로(SMR)까지 한국 기업들의 텍사스 에너지 투자가 빠르게 확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전력망에 비상등
애벗 주지사는 텍사스 공공요금위원회(PUCT)와 전력안정성위원회(ERCOT)에 데이터센터의 전력·용수 사용 현황을 전수 조사하고, 감사가 끝날 때까지 신규 데이터센터의 전력망 접속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ERCOT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대규모 전력 소비시설의 계통연계 신청 규모는 438GW(최근 집계는 474GW)에 달한다.
이는 텍사스가 기록한 최대 전력 수요의 5배가 넘는 규모로, 이 중 약 90%가 AI 데이터센터에서 신청한 물량이다. PUCT와 ERCOT는 이에 따라 대형 전력 소비자를 평가하는 ‘Batch Zero’ 연구까지 보류했다.
애벗 주지사는 앞서 6월에도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에 접속할 때 주민 전기요금을 낮추고 관련 인프라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논란은 정치권으로도 번져, 공화당 소속 시드 밀러 텍사스 농업위원장은 애벗 주지사가 데이터센터 업계 후원금을 반환해야 한다고 비판했고, 지나 이노호사 민주당 주지사 후보도 애벗 행정부의 데이터센터 정책을 문제 삼았다.
이제 텍사스의 고민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유치하느냐가 아니라, 그 데이터센터가 쓸 전기를 누가 만드느냐다. 이 공급 부족이야말로 한국 기업들이 텍사스 에너지 시장에 뛰어드는 명분이자 사업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 대미투자 1호는 텍사스 가스
한국 정부와 산업계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은 텍사스 엔시날(Encinal)에 짓는 198억 달러(약 29조원) 규모 가스복합화력발전 사업에 지분 투자하는 방안을 놓고 미국과 막바지 협의를 벌이고 있다.
이 사업이 성사되면 지난해 관세 협상에서 합의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공약의 첫 프로젝트가 된다. 조선업 협력에 1,500억 달러, 반도체·에너지 등 전략 프로젝트에 2,000억 달러가 배정된 이 공약을 집행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한미 전략투자 코퍼레이션(Korea-US Strategic Investment Corp.)’까지 세워뒀다.
엔시날 발전소는 가스터빈 발전 1.3~1.4기가와트(GW)와 복합화력 발전 5GW를 합쳐 총 6.3~6.4GW 규모다. 부지와 장기 천연가스 공급은 이미 확보됐고, 2030년 1단계 가동을 시작해 2032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인근에는 미국 데이터센터 개발사 릴레이티드 디지털(Related Digital)이 최대 5GW 규모 AI 데이터센터 단지를 짓고 있어, 이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의 핵심 수요처가 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와의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으로 10년 이상 안정적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한국의 대미 투자 요건인 ‘상업적 합리성’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애벗 주지사가 막으려는 것이 ‘준비 안 된’ 데이터센터의 무분별한 접속이라면, 한국이 지으려는 것은 그 데이터센터들이 쓸 전력 자체이니 텍사스 입장에서도 반길 투자인 셈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22일부터 25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장관과 이 사업의 재원 구조와 사업성을 협의했다.
그는 “현금흐름이 안정적인 사업일수록 매력적이며, 에너지 프로젝트가 이 점에서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특수목적법인(SPV)을 세워 대미투자펀드로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며, 연 5%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매체 보도에 따르면 삼성물산·현대건설·DL이앤씨가 설계·조달·시공(EPC)에, 두산에너빌리티(Doosan Enerbility)가 가스터빈 공급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업은 이르면 8월 중 한미 전략투자위원회 심의에 오르고, 이후 미국 측 심사와 대통령 승인을 거쳐야 정식으로 대미투자 1호로 지정된다.
◈ 태양광도 원전도 같은 이유
텍사스의 전력 부족은 한국 기업들이 이미 태양광에서도 확인한 기회다. 지난 1월 27일 콘초 카운티(Concho County)에서 착공한 한국중부발전(KOMIPO)·현대건설·EIP자산운용의 5억2천만 달러 규모 ‘루시 태양광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350메가와트(MW) 규모로 2027년 중반 가동을 목표로 하며, 생산 전력의 88%는 이미 20년치 장기 전력구매계약으로 사전 판매됐다.
현대건설이 태양광 패널을 공급하고 프리모리스 리뉴어블 에너지(Primoris Renewable Energy)가 시공을, 한국중부발전이 40년간 장기 운영을 맡는 구조이며, 전력 판매 수익 일부는 지역 장학기금으로 적립돼 한인 학생과 저소득층 학생의 학자금을 지원한다.
착공식에는 도광헌 주(駐)달라스 대한민국출장소장, 김경훈 한국무역협회(KITA) 달라스지부장 등 지역 한인 경제·외교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김경수 현대건설 전무는 착공식에서 “이번 사업을 단발성 프로젝트로 보지 않고, 태양광을 넘어 대형 원전과 데이터센터, SMR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현대건설은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 손잡고 텍사스에서 페르미 아메리카(Fermi America)가 추진하는 대형 원전 사업에 참여 중이고, DL이앤씨는 엑스에너지(X-Energy)와 함께 텍사스만(灣) 연안 다우케미컬(Dow Chemical) 부지에 SMR을 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SK그룹과 한국수력원자력, HD현대도 미국 SMR 기업 테라파워(TerraPower)에 지분을 투자해 와이오밍주에서 4세대 SMR 실증 사업에 참여하고 있어, 한국 자본의 미국 원전·SMR 진출은 텍사스를 넘어 확산되는 흐름이다.
◈ 짓는 나라, 쓰는 나라
텍사스 전력난을 키운 요인 중 하나도 한국 기업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삼성전자는 오스틴·테일러 반도체 클러스터에 400억 달러를 투자했고,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에 따라 64억 달러의 보조금도 받았다.
이 클러스터는 2024년 한 해 중부텍사스 경제에 198억 달러를 기여하고 3만8,500개 일자리를 뒷받침했지만, 동시에 텍사스 그리드의 대형 소비자이기도 하다. 반도체 공정에는 막대한 전력과 초순수(超純水)가 필요해, 삼성의 텍사스 공장 확장 자체가 지역 전력망에 부담을 더하는 요인으로 꼽혀 왔다.
데이터센터든 반도체 공장이든 텍사스의 전력 수요를 늘리는 쪽에도, 그 전력을 공급하는 쪽에도 한국 기업이 함께 있는 구조인 셈이다.
◈ 커지는 진출 흐름
오스틴한인회(Austin Korean Association) 등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 기업들은 텍사스에서 59개 프로젝트에 약 507억 달러를 투자해 1만2,950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2013~2023년 기준으로는 38개 프로젝트·205억 달러·7,000여 개 일자리로 집계되는 등 기관마다 통계 시점과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최근 몇 년 새 투자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실제로 2024년 상반기에만 9개 프로젝트에 275억2,000만 달러가 새로 투자돼 약 4,8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됐다.
주요 거점은 삼성이 있는 오스틴·테일러 권역, 자동차·에너지 기업이 몰린 달라스·포트워스 권역, 에너지 기업이 밀집한 휴스턴 권역 등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여기에 198억 달러 규모 가스발전 사업까지 더해지면 텍사스를 향한 한국 자본의 흐름은 한층 더 두꺼워질 전망이다.
결국 애벗 주지사가 지난 3일 내린 접속 중단 지시는, 한국 기업들이 텍사스 에너지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 셈이다. 엔시날 가스발전 사업이 대미투자 1호로 최종 확정되면, 이는 개별 프로젝트를 넘어 한미 양국이 관세 협상 이후 처음으로 내놓는 상징적 결과물이 된다. 업계에서는 이 사업의 성사 여부가 향후 반도체·조선 등 다른 분야의 대미 투자 결정에도 하나의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유광진 기자 ⓒ KT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