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방부터 물병까지, 십대의 ‘작은 물건’에 담긴 정체성
한 고등학교의 등교 시간. 정문을 지나는 학생들의 가방에는 알록달록한 키링과 작은 인형, 배지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물병에는 여러 장의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고, 노트북 커버와 휴대폰 케이스에도 저마다 좋아하는 캐릭터와 문구가 자리한다.
과거 학생들이 사물함 문에 사진과 마그넷을 붙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면, 요즘 학생들에게는 책가방과 물병, 신발, 휴대폰 케이스가 새로운 캔버스가 되고 있다.
특히 하루 종일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학생들에게 책가방은 단순히 책과 노트북을 넣는 물건을 넘어선다. 어떤 키링을 달고 어떤 스티커를 붙이는지를 보면 그 학생이 좋아하는 것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때로는 소중하게 간직하는 관계까지 엿볼 수 있다.
■ 사물함 대신 등에 멘 ‘나만의 공간’
요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사물함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수업마다 교실을 옮겨야 하는 데다 건물이 크고 이동 시간이 짧아 사물함에 들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들은 교과서와 노트북, 개인 소지품을 대부분 가방에 넣은 채 하루 종일 학교를 돌아다닌다. 자연스럽게 가방은 학생이 가장 오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개인 공간’이 됐다.
교복을 입는 일부 사립학교나 가톨릭계 학교에서는 이런 특징이 더욱 눈에 띈다. 옷으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 만큼 신발과 가방, 가방에 매단 키링이나 배지가 작은 자기 표현 수단이 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가방을 보면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아무 장식 없이 깔끔하게 들고 다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인형과 캐릭터 키링을 여러 개 달거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배지와 스티커를 모아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학생도 있다.
■ 키링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다
학생들에게 이런 물건들은 반드시 비싸거나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누가 주었는지, 어디에서 샀는지, 어떤 기억과 연결돼 있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가족에게 선물 받은 키링, 친구와 함께 맞춘 캐릭터 소품, 여행지에서 산 작은 장식, 졸업한 선배에게 받은 배지처럼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다.
십자가 모양의 키링처럼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물건을 선택하는 학생도 있고, 좋아하는 스포츠팀이나 가수, 영화와 캐릭터를 드러내는 물건을 달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와 관련된 사진이나 작은 기념품처럼 개인적인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소지품도 있다.
물병 역시 대표적인 자기 표현 공간이다. 스티커 한두 장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브랜드와 캐릭터, 여행지, 학교 행사, 친구에게 받은 스티커가 겹겹이 쌓이는 경우도 많다. 오래 사용한 물병 하나가 어느새 몇 년 동안의 취향과 추억을 기록한 작은 앨범처럼 변하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물건의 가격보다 그 물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 작은 선택으로 연습하는 ‘나는 누구인가’
청소년기는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발견하고 또래 집단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시기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키링 하나, 스티커 한 장을 고르는 일도 청소년에게는 자기 표현의 작은 연습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방에 달았을 때 친구가 이를 알아보고 말을 걸거나, 같은 스포츠팀의 스티커를 발견한 친구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기도 한다. 작은 물건 하나가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신호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청소년에게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과 동시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소속감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장식을 최소화한 검은색 가방을 선호하는 학생에게는 깔끔함 자체가 취향일 수 있다. 무엇을 많이 달았느냐보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다.
부모에게는 별것 아닌 키링처럼 보여도 자녀에게는 친구 관계나 좋아하는 문화, 최근 관심사를 보여주는 단서일 수 있다.
“그건 어디서 났어?” “왜 그 캐릭터를 좋아해?”처럼 가볍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평소 쉽게 꺼내지 않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다만 의미를 억지로 해석하거나 이유를 캐묻기보다는 아이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 이름표보다 가방이 더 많은 것을 말할 때
학교 복도를 걷다 보면 학생들의 가방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가방에는 키링 하나만 조용히 달려 있고, 어떤 가방에는 작은 인형과 배지, 리본이 가득하다. 물병에는 몇 년 동안 모아온 스티커가 층층이 쌓이고, 노트북 커버에는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십대들은 매일 들고 다니는 작은 물건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때로는 이름표보다 가방이 그 학생을 더 잘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