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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꿈꾸다.

Last updated: 10월 27, 2023 1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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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아침에 히터를 점검하는 기사가 오기로 했다. 

영어로 대화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답답하다. 이놈의 영어 울렁증을 언제나 벗어날까. 요새는 달라스 지역에 한국 음식점이 다양하게 들어서고 한인 커뮤니티도 많이 생겨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영어 쓸 일이 더 없어지니 실력이 영 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미국 땅이니 피하려 해도 이처럼 영어와 맞닥뜨리는 순간이 온다. 역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17년 전에 미국 텍사스로 이주했다. 처음 몇 달은 적응하느라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낭패감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니 해야 할 일도 많았는데, 말하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치로 어림잡아 대화한다 해도 아이들 선생님을 마주하거나 관공서에서 일을 볼 때 엉터리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졸업 후 다녔던 회사에서도 영어를 했지만, 현지인과 대화하기엔 아주 부족했다. 틀리더라도 자꾸 해야 하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문법이 틀리면 상대는 기다려 주는데도 스스로 주눅이 들어 말이 엉켜 버렸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말하는 것을 점점 더 꺼리게 되었다. 

아이들 농구팀이 연습할 때나 학교 오케스트라 학부모 모임에 가면 미국 부모들이 말을 시킬까 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말 하나는 막힘없이 하며 사람들과 유쾌하게 지내왔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대화 도중에 실수하여 어색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말하지 못하면 소통에 한계가 생기고, 소통이 되지 않으면 관계가 깊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미국 사회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한인 사회에만 머물게 되었다. ‘정중지와 부지대해 (井中之蛙 不知大海),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한다.’라는 장자의 말처럼 스스로 땅을 파고 돌을 쌓아 만든 우물에 갇혀서 그 작은 세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너른 땅 미국에서 살았지만, 실상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내가 만든 우물 안에서 맴돌았다. 많은 인연과 기회가 넘실대는 바다가 문밖에 펼쳐져 있음을 아는데도 나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영어는 그 바다를 헤쳐 나갈 돛단배였는데, 내 배는 너무 부실했다.

말을 막힘없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절실히 느낀 적이 있다. 몇 해 전 한국 방문 때의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어서 2주간의 격리를 해야 했다. 공항 근처에 원룸을 얻었는데, 작은 방에 욕실과 주방이 딸린 구조였다. 

그립던 한국 땅에 도착했지만,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얼마 안 되는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바닥을 닦고 소꿉장난 같은 집안일을 다 마쳐도 시간은 남아돌았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갑갑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어 2월의 서늘한 공기를 방 안에 들여놓았다. 

창밖엔 겨우내 마른 풀이 군데군데 버티고 있는 널따란 노지가 있었고 그 너머로 3, 4층 높이의 또 다른 원룸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몇몇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00 세탁소, 00 마트, 00 칼국수…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커튼을 날리며 불어 드는 찬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깥세상에 한글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선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마주치는 누구와도 예의를 갖추어 대화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 호의를 가지는지 혹은 언짢아하는지 민감하게 느끼고 대처할 수 있었다. 적어도 말 못 해서 생기는 오해는 없었다. 단절도 열등감도 없었다. 

국가의 3대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처럼 그 전체를 완성해 주는 것은 역시 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는 우물 안에 갇혀야 보이는 게 있나 보다. 창 너머 한글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 바깥엔 소통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게 한글과 한국말은 언어를 넘어 관계이며 조국이었음을 깨달았다. 격리가 끝나 숙소를 나가던 날, 입구에서 기다리던 언니와 형부를 만나 유창한 한국어로 한을 풀었다. 

어디를 가나 들리는 우리말이 나를 충전해 주었다. 나에게 모국어와 조국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받은 에너지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여전히 우물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사랑하는 이 땅, 미국에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보고 싶다. 내일은 되든 안 되든 마음 먹고 영어를 해볼 참이다. 조금만 용기를 내봐야겠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든든한 배를 띄울 날이 오지 않을까. 

  먼바다, 깊은 세계로 나가게 되기를 꿈꾼다.

 

백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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